아티스트와 뮤즈 (5) 앙리 툴루즈 로트렉과 수잔, 카르망, 제인
Artist & Muse <5> Henri de Toulouse-Lautrec & Three Muses
툴루즈 로트렉의 뮤즈들: 수잔, 카르망, 제인
Henri de Toulouse-Lautrec, Suzanne Valadon(1885), Carmen Gaudin(1888), Jane Avril(1899)
몽마르트르 캬바레 '물랑 루즈(Moulin Rouge)'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은 1864년 프랑스 남부 알비의 명문 백작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래 전부터 혈통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이 성행해 격대로 뼈가 부서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 유전병이 나타났다.
로트렉은 게다가 13살 때 의자에서 떨어져 넓적다리 뼈를 다쳤다. 이후 하반신 성장이 멈추었고, 걸음마저 이상해져 지팡이에 의지해야 했다. 상반신은 성인, 하반신은 아이가 된 그의 병명은 농축이골증, 훗날 로트렉 증후군으로도 불리운다.
Henri de Toulouse-Lautrec, 1894(left)/ Henri de Toulouse-Lautrec by Maurice Guibert, 1892
로트렉의 부모도 사촌지간이었다. 아버지는 가문의 수치인 로트렉을 심하게 냉대했지만, 어머니는 나가 놀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로트렉을 지원했다. 정상적인 귀족, 보통 남자로 살아갈 수 없었던 로트렉은 19살에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좋은 시절) 전성기 파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했다. 로트렉은 빈센트 반 고흐, 에드가 드가와 친구가 됐으며, 물랑 루즈(빨간 풍차)와 매춘굴에 빠져들었다.
백작 아버지는 아들 툴르즈 로트렉이 가문 이름을 그림에 사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유산 상속에서 일부를 제외했다. 삼촌은 로트렉의 그림을 불에 태워버렸다. 엄마만이 유일하게 미술하는 로트렉을 지원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Self Portrait, 1883/ Henri de Toulouse-Lautrec, Coffee Pot, c.1884
신체적 결함으로 열등감에 시달렸던 귀족 가문의 로트렉은 아이러니하게도 댄서, 매춘부, 세탁부 등 하층계급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상류계급 여인들처럼 위선적이지 않고, 진솔했다. 로트렉은 체격에 비해 성기가 무척 큰 자신을 "큰 주둥이가 달린 작은 커피 포트(little coffee pot with the large spout)"라고 불렀다. 그는 매춘굴에서 왕성한 성욕을 해소하며, 그림을 그렸다.
로트렉은 친절한 남자였다. 와인과 파테를 가져가 매춘부들과 나누어 먹고, 카드놀이도 하고, 그들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해 선물을 주고, 서커스, 연극, 식당에 데려갔다. 그는 또한 요리광이었다. 압생트와 코냑을 혼합한 칵테일 '지진(Tremblement de Terre)' 레서피도 개발했다. 로트렉 사망 후 아트딜러 모리스 조이양(Maurice Joyant)은 돌고래, 다람쥐, 메뚜기 등 로트렉의 레시피를 모은 책 '요리의 예술(L'Art de la Cuisine)'을 출간했다.
매춘부들은 또한 로트렉에게 뮤즈들이었다. 그 결과, 22세에 매독에 걸렸다. 그리고, 알콜 중독과 성병으로 인해 편집증과 환각에 시달렸다. 어느날 시골에서 휴가 중 로트렉은 거미들에게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Moulin Rouge: La Goulue 1891(from left)/ Reine de Joie(Queen of Pleasure), 1892/ May Milton, 1895
로트렉은 1899년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3개월간 기억에 의존해서 '서커스에서: 스페인 산책(At the Circus: The Spanish Walk)' 시리즈 39점을 완성했다. 그림을 본 의사는 건강이 개선된 것으로 간주하고 퇴원시켰다. 로트렉은 파리 작업실로 돌아갔다가 프랑스 전역을 여행했다. 그의 건강은 알콜과 성병으로 급격히 쇠약해졌다.
'몽마르트의 작은 거인' 앙리 툴루즈 로트렉은 1901년 9월 9일 36세에 눈을 감았다. 평생 외면했던 백작 아버지는 로트렉 사망 직전에 찾아왔다. 로트렉은 "아빠, 전 알아요. 당신이 죽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무반응이었다. 로트렉은 "늙은 바보!"라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로트렉은 아버지보다 12년 앞서 사망함으로써 '백작(Comte)' 명칭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Vincent van Gogh, 1887(left)/ Pablo Picasso, The Blue Room, 1901.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DC
로트렉은 11살 연상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파리의 코르몽 아틀리에에서 만났다. 이들에겐 공통점도 많았다. 알콜 중독자였으며(둘다 특히 독주 압생트를 좋아했다), 일본 풍속화 목판화 기법 우키요에(浮世繪)의 영향을 받았으며, 30대 후반에 요절했다. 로트렉이 그린 반 고흐에도 앱생트가 놓여있다.
1901년 로트렉이 사망한 해 파리에 도착한 파블로 피카소는 같은 해 로트렉의 그림(May Milton, 1895)을 담은 '블루 룸'을 그리며 오마쥬를 표했다. 로트렉은 20여년간 회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와 포스터 등 363점, 드로잉 5천84점을 남겼다.
#1 모델/화가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Henri de Toulouse-Lautrec, The Hangover(Suzanne Valadon), 1889. The Harvard Museum Collection
1885년 스무살의 툴루즈 로트렉은 수잔 발라동(1865-1938)을 만났다. 본명은 마리-클레멘타인 발라동(Marie-Clémentine Valadon). 발라동의 엄마는 몽마르트르 세탁부였고, 아버지는 모른 채 가난 속에서 자랐다. 11살 때부터 모자 작업실에서 일하기 시작, 장례 제품 공장, 시장, 웨이트레스, 서커스 곡예사까지 산전수전을 겪다가 15살에 화가 앙투안 드라 로셰푸콜드와 테오 와그너를 만나 모델일을 시작했다.
이후 마리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뮤즈가 되었다가 로트렉을 만났다. 로트렉은 마리에게 '수잔'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발라동은 로트렉의 연인이자 뮤즈가 됐다. 로트렉은 1985년 발라동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술병 앞에 앉은 여인 ‘숙취(The Hangover, 1889)'의 모델도 발라동이다. 이들은 1888년 발라동의 자살 기도 사건 후 헤어지게 된다.
Suzanne Valadon, Joy of Life, 1911.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발라동은 모델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94년 국립미술협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 화가이기도 했다. 에드가 드가는 발라동에게 동판화를 가르쳤고, 작품도 사주었으며, 아트 콜렉터 앙브로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에게도 소개했다.
사생아였던 발라동은 18세에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를 출산했다. 아버지는 밝히지 않았다. 모리스는 9살에 미구엘 위트릴로에게 입양되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가 된다. 발라동은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와 열애 후 그를 차버리고, 스탁브로커 폴 무씨스와 결혼했다. 이후 아들 모리스의 친구인 23세의 화가 앙드레 어터(Andre Utter)와 바람나 재혼했다. 발라동은 1938년 72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장례식엔 피카소, 조르쥬 브라크, 앙드레 드랭이 참관했다.
#2 세탁부 카르망 고댕 Carmen Gaudin
Toulouse-Lautrec, A Montrouge (Rosa la Rouge), 1886-87. Barnes Foundation Collection, Philadelphia(left)/ Toulouse-Lautrec, Carmen Gaudin, 1884-85, La Blanchisseuse, 1885-86
툴루즈 로트렉은 1884년 몽마르트르에서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이 운영하는 미술학교 코르몽 아틀리에를 다니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도 이 아틀리에를 다녔다. 어느날 수업 후 친구 앙리 라슈(Henri Rachou)와 식사 중인 빨간 머리의 카르망 고댕(Carmen Gaudin)을 만났다. 로트렉은 빨간 머리에 집착했다. 고댕은 23살의 세탁부였고, 바로 로트렉의 모델이 되어 약 13점의 회화와 드로잉 몇점이 나오게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세탁부(La Blanchisseuse, 1885-86)'다. 고단하게 세탁일을 하고 있는 여인의 절망스러운 뒷모습과 거칠지만, 강인한 손이 묘사된 이 그림은 에밀 졸라(Emile Zola)의 자연주의 소설 '목로주점(L’Assommoir, 1877)'의 주인공 제르베즈를 연상시킨다. 당시 세탁부들은 생계를 위해 몸을 팔기도 했다. 노동계급 여인의 고행을 담은 '세탁부'는 2005년까지 창고에 묻혀있다가 같은 해 크리스티에 나왔다. 그리고, 당시 회화 경매 사상 최고가인 2천240만 달러에 낙찰됐다.
Toulouse-Lautrec, A Montrouge (Rosa la Rouge) on display at Barnes Foundation Collection, Philadelphia
카르망 고댕은 또한 로트렉 캔버스 앞에서 매춘부 로자로 분했다. 매춘부에 대한 연구 로자 라 루즈(Study of a prostitute: Rosa La Rouge)'는 카바레 가수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의 노래 '몽루즈(Montrouge)'에 등장하는 살의를 품은 매춘부다. 로자는 포주 애인에 의해 강탈 당하고, 길가에 죽은 채 발견되었다.
#3 '물랑 루즈' 댄서 제인 아브릴 Jane Avril
Jane Avril photo by Paul Sescau, 1890/Henri de Toulouse-Lautrec, Jane Avril at the Jardin de Paris, 1893
1889년 카바레 물랑 루즈가 오픈할 즈음 로트렉은 포스터를 의뢰받았다. 당시 부모의 재정지원을 받았지만, 엄마가 파리를 떠난 상태라 돈을 벌기 위해 상업 포스터 제작을 수락했다. 물랑 루즈 측에서는 로트렉에게 대신 클럽의 제일 앞자리를 지정석으로 예약해주고, 그의 회화도 전시했다.
로트렉은 이 광고 작업으로 상업미술을 고급미술로 승격시켰으며, 캬바레 공연자들을 스타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이로써 팝 아트(Pop Art)와 앤디 워홀(Andy Warhol)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로트렉은 물랑 루즈에서 가수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 프렌치 캉캉 댄서 라 굴르(La Goulue, 루이스 웨버), 그리고 뮤즈가 될 프렌치 캉캉 댄서 제인 아브릴(Jane Avril, 1868-1943)을 만났다.
제인 아브릴의 본명은 잔느 루이즈 보동(Jeanne Louise Beaudon, 1868-1943). 엄마는 매춘부, 아버지는 이탈리아 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알콜 중독인 엄마의 학대를 받아 10대 때 가출했으며, 팔다리를 무절제로 흔들어대는 신경질환 무도증(St Vitus' dance/Sydenham’s chorea)과 안면경련증이 발작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의사는 치료법으로 춤을 조언했다.
병원을 떠날 무렵, 사랑했던 의사와 결별하자 자살을 생각했던 잔느는 매춘부로 끌려갔다. 이후엔 소설가 아르센 우쎄(Arsène Houssaye)의 비서, 곡예사, 파리박람회의 매표소 등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의사말을 따라 춤을 배웠다. 1888년 고아 출신 작가 르네 보이레스비(René Boylesve)와 연인이 됐다.
Jane Avril, c. 1900/ Henri de Toulouse-Lautrec, Jane Avril Leaving the Moulin Rouge, 1893/ Jane Avril entering the Moulin Rouge, 1892
잔느 보동은 영국 시인 로버트 셰라드(Robert Sherard)가 지어준 예명 '제인 아브릴'을 쓰며 캉캉 댄서로 유명해진다. 1889년엔 물랑 루즈의 호화쇼 '자르댕 드 파리(Jardin de Paris)'의 고정 댄서로 고용됐다. 물랑 루즈는 광고 포스터를 로트렉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제인 아브릴은 독특한 춤으로 '광란의 오키드(an orchid in a frenzy)'라는 평을 받으며, 세기말 파리의 밤무대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귀족의 아들과 귀족의 피가 섞인 매춘부의 딸, 그리고 신체적인 결함이라는 공통점으로 로트렉과 아브릴은 친밀해졌다. 로트렉은 아브릴의 무대 뿐 아니라 일상까지 포착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Mademoiselle Eglantine's Troupe, 1896/ Sherry-Lehmann Wine & Spirit shopping bag, Cooper-Hewitt Museum collection
제인 아브릴은 1895년 영국 출신 댄서 메이 밀턴과 연애했으며, 이후엔 한 남자의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입센과 콜레트의 연극 무대까지 진출했다가 37살에 무대에서 은퇴했다. 43살에는 화가 모리스 비아이스(Maurice Biais)와 결혼해 안정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대공황기에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1943년 기난에 시달리다가 눈을 감았다.
할리우드에서 '물랑 루즈' 영화가 여러편 제작됐다. 1952년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에서는 자자 가보(Zsa Zsa Gabor), 2001년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에선 니콜 키드만이 제인 아브릴 역을 맡았다. 맨해튼 파크애브뉴 뉴욕한국문화원 건너편의 와인숍 셰릴-레먼(Sherry-Lehmann Wine & Spirits)은 로트렉의 Mademoiselle Eglantine's Troupe을 쇼핑백으로 사용해왔다.
*아티스트와 뮤즈 <4> 모딜리아니와 잔느, 안나, 베아트리스
4/21/23에 씌여진 기사를 보고 찾아와서 글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