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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Modern/Contemporary Artists
2017.01.01 00:17

척 클로스의 첫 뉴욕,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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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15) 우리가 고군분투 화가였을 때

척 클로스(Chuck Close)의 첫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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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클로스와 '자화상'(1967-68)

 

1967. 무명화가 척 클로스가 소호에 정착한 1967년, 동서의 냉전, 미소의 우주전쟁, 베트남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백악관 주인은 린든 B. 존슨이었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비롯 미 전역에서 반전 데모가 한창이었다. 스타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병역을 거부해 지탄을 받았다. 록그룹 도어스와 지미 헨드릭스의 데뷔 앨범과 아레사 프랭클린의 'RESPECT'가 나왔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프리실라와 결혼한다. 그해 7월 뉴저지 뉴왁에선 경찰이 불법 흑인 택시운전사에게 총격을 발사하며 폭동이 일어나 6일간 지속됐다. 인근 플레인필드에서도 폭동이 발생한다. 미국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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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개통된 맨해튼 세컨드애브뉴 86스트릿 역의 척 클로스 자화상. 

*2애브뉴 지하철의 공공미술 작가들 

 

"나는 그린 스트릿(Greene St.)의 무척이나 추운 로프트(loft, 공장을 개조한 아파트)에 월 150달러를 내고 살았다. 이미 이곳에 살고 있던 내 모든 친구들은 말도 안되게 비싸다며 조롱했다. 우리 로프트엔 난방이 없었다. 나는 1년 내내 장갑을 끼고 그림을 그렸고,  오른속 집게 손가락만이 에어브러시의 버튼 때문에 튀어나왔다. 문자 그대로 커피는 머그잔에서 얼 정도였고, 변기는 밤새 얼어버릴 터였다. 우리는 이불을 쌓아 놓고 그 아래에서 잤다."

  

'My First New York: Early Adventures in the Big City' 척 클로스의 에세이에 따르면, 1967년 그가 뉴욕에 정착했을 당시 소호 거리는 쥐, 넝마, 쓰레기 트럭이 난무했고, 때때로는 마피아가 소유한 쓰레기 회사들 끼리 전쟁을 벌여 트럭을 서로 태우기도 했다. 당시 하우스턴 스트릿과 카날 스트릿 사이, 즉 소호에는 20여명 남짓의 아티스트들이 살고 있었다. 브라이스 마덴(Brice Marden),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낸시 그레이브스(Nancy Graves), 필립 글래스(Phil Glass) 등이 몇 블록 사이에 두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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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클로스 사진전@패리쉬아트뮤지엄, 이스트햄턴(2015.5) 

 

척 클로스와 소호의 아티스트들, 작가들, 영화감독들은 매일 밤 누군가의 로프트에 모여서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듣거나, 이본느 라이너(Yvonne Rainer)와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등 무용가들의 공연을 보곤 했다. 작곡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당시 유일하게 월급쟁이 조수를 두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그들은 카페테리아, 지금의 오데온(Odeon)에 모여 둘러앉아 내프킨에 아이디어를 끄적이곤 했다.

 

역시 네트워킹이 통했다. 척 클로스의 예일대 동문이 스쿨오브비주얼아트(School of Visual Art) 학장이 되면서 무명의 아티스트들을 대거 강사로 채용했다. 척 클로스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 SVA는 미쳤었다. 실라스 로데스(Silas Rhodes) 디렉터는 학생들을 낙제시켜서 징병되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강사진 학생들과 사실 차이도 별로 없었고, 바빠서 이에 대해 저항할 겨를도 없었다. 모두들 반항의 시기였다. 

 

"우리는 아무튼 가르칠 것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생존(Survival)'이라는 수업을 기억한다. 만일 로프트에 살기를 원하면, 석고보드를 올리고, 천장에 단열처리를 하고, 난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주에는 배관공을, 다음 주엔 전기기사를 데려왔다. 그들은 진짜 골자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우리는 뉴욕에서 살면서 겪을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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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Ronald Nameth

*Exploding Plastic Inevitable(EPI): 앤디 워홀이 1966-67년 기획했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의 콘서트나 워홀의 영화 상영회, 워홀 팩토리 단골들의 무용, 공연 등을 올렸다. 

 

60년대 뉴욕의 스타 작가는 앤디 워홀이었다. 척 클로스와 아티스트들은 이스트빌리지 세인트마크 플레이스(8스트릿)에 앤디 워홀이 운영하던 이벤트 '익스플로딩 플래시틱 인에비터블(Exploding Plastic Inevitable)로 몰려가기도 했다. 앤디 워홀과 수행원들은 라우셴버그와 그의 수행원들과 백룸에 있었으며, 우리 젊은 아티스트들,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도로시아 록번(Dorothea Rockburne), 멜 보크너(Mel Bochner)은 앞에 부스를 지켰다. 어떤 때는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엔 현대미술 갤러리가 고작 14개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토요일엔 86스트릿 매디슨애브뉴에서 내려가며 뉴욕에 전시되는 현대미술품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위층에는 음악홀도 있었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 서던 컴포트(Southern Comfort, *뉴올리언스 산 위스키) 한병을 들고  쥬크박스 옆에 기대어서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술값 대신 작품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존 체임벌레인(John Chamberlain)의 대형 조각이 앞에, 한쪽 벽엔 정말 아름다운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작품이, 백룸 코너엔 빨간 댄 플래빈(Dan Flavin) 작품이 창백한 워홀의 수퍼스타들 꼭대기에 특히 으시시한 색조로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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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클로스 Chuck Close(1940-2021)

극사실주의 화가, 사진가. 워싱턴주 먼로에서 태어나 어려서 난독증에 시달렸다. 열네살 때 잭슨 폴락의 그림에 매료되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워싱턴대를 거쳐 예일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7년 뉴욕에 정착했다. 사진을 모델로 격자로 나눈 후 셀을 일일이 그려 조합하는 방식의 대형 인물화로 명성을 얻었다. 1988년 척추혈관 손상 후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작업하고 있다. 지금은 이스트빌리지와 롱아일랜드 브리지햄턴, 롱비치를 오가면 살다가 2021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http://chuckclose.com

*The Mysterious Metamorphosis of Chuck Close <New York Times, 2016. 7. 13>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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