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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라이벌 레오나르도에 대한 '열등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6 March 1475 – 18 February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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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피노 델 콘테가 그린 70세의 미켈란젤로. 미완성 작품으로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장품. 

 
뉴욕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열풍이 시작됐다. 
 
다운타운 월드트레이드센터 오큘러스(Oculus)에선 지난 6월 23일부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창세기'와 '최후의 심판'을 복제한 대형 사진전 'Up Close: Michelangelo's Sistine Chapel'이 열리고 있다.
 
업타운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는 11월 13일부터 미켈란젤로 드로잉전 'Michelangelo: Divine Draftsman and Designer'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삶을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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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상, 피에타상,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 걸작을 탄생시키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미술가 미켈란젤로. 그의 삶은 열등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면서도 젊은 남성에게 연애 편지를 쓰는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였다. 생후 1개월만에 엄마와 떨어져서 유모의 젖을 빨며 살았고, 열다섯살에 그림 때문에 벌어진 언쟁으로 코뼈가 부러졌다. 

 

그 이후 납작한 코가 된 미켈란젤로는 은둔자로서 고독하게 삶을 그리다가 갔다. 

 

 

8.jpg Portrait of Michelangelo by Daniele da Volterra

 

 

본명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1475-1564).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라파엘로(1483-1520)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트로이카’였다. 미켈란젤로는 89세 생일을 코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의 평균 수명은 43세였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화가이자 조각가였을 뿐만 아니라 건축가이며, 시인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생전에 전기가 2권이나 출간됐다. 한 권은 건축가이자 당대의 유명 미술평론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가 썼다. 

 

 

▶유모의 남편은 석공: 피렌체에서 62마일 떨어진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미켈란젤로가 생후 1개월 됐을 때 아버지 루도비코는 피렌체에서 3마일 떨어진 세티그나노의 유모에게 아들을 맡겼다. 유모의 남편은 석공이었고, 그로부터 돌을 만지는 기술을 배웠다. 조르지오 바사리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젖을 따라서 난 끌과 망치를 다루는 기술을 받은 셈이다”라고 회고했다.  

 

▶변호사 희망 저버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부오나로티는 미켈란젤로가 변호사나 가문의 명예가 될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기대하고, 문학 수업을 할 수 있는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화가가 되려고 하자 아버지와 형들은 가문의 수치라면서 몰매를 때렸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더 열심히 미술을 공부하기로 다짐하게 된다. 

 

 

▶신동화가: 교회당의 그림을 베끼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준다. 아버지 루도비코조차 아들의 재능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13살 짜리 미켈란젤로를 피렌체의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에게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는다. 이때 훗날 시스틴 예배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게 될 프레스코 화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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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뮤지엄이 소장한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왼쪽)와 '죽어가는 노예'.  Photo: Sukie Park

 

 

▶메디치와 미켈란젤로의 랑데부: 피렌체의 거부이자 예술을 사랑했던 로렌조 드 메디치가 어느날 자신이 소유한 산 마르코의 미술관 정원을 걷다가 사티로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남자의 얼굴과 몸에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진 숲의 신)를 대리석으로 조각하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메디치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방을 하나 내주고, 용돈과 미술용품을 사준다. 그리고, 매일 소년과 식사를 했다. 이때 피렌체의 파워 엘리트, 예술가, 문인들 사이에서 소년은 지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소년은 열다섯살의 미켈란젤로였다.  

 

▶부러진 코뼈: 스물아홉살에 다비드처럼 황홀한 남성미의 조각을 만들어낼 미켈란젤로 자신은 신체적으로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그는 열다섯살 때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던 세살 위의 피에트로 토리지아노와 종종 싸웠다. 어느 날 교회의 프레스코를 베끼는 수업시간이 열렸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학생들의 작품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이를 참다 못한 토리지아노가 강펀치를 날려 미켈란젤로의 코를 부러뜨렸다. 이 사건은 한 위대한 미술가의 삶과 서양미술사 자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 후 토리지아노는: 피렌체의 파워맨 로렌조는 토리지아노에게 격분했다. 급기야 토리지아노는 로렌조를 피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조각가로서보다, 위대한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망친 인물로 더 유명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성 제롬의 위임을 받아 일했지만,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화가 나서 자신의 작품을 파손해버린다. 토리지아노는 성인의 이미지를 파괴한 죄로 사형선고가 내려져 감옥에서 생애를 마친다.

 

▶위조 작가(?)로 유명세: 어느날 로렌조는 미켈란젤로에게 고대 그리스 조각 큐피드상을 베껴보라고 제안한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큐피드를 제작해서 골동품처럼 흙먼지를 입혔다. 이 큐피드를 라파엘 리아리오 추기경이 구입했고, 후에 소문을 들은 추기경이 알게되어 돈을 반환해주었다. 하지만,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에 감탄해서 로마로 데려갔으며, 결국 *세에 스타덤에 올릴 조각 '피에타(Pieta)'를 제작하게 된다. 바티칸뮤지엄이 소장한 '라오콘과 두 아들(Laocoon & His Sons)'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라오콘과 두 아들'은 1506년 로마에서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다. 

 

 

Leonardo-and-Michelangelo-001.jpg 레오나르도(왼쪽)와 미켈란젤로

 

▶일그러진 얼굴: 부러진 코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진 미켈란젤로는 열등감에 찌들어 살았다. 가장 큰 라이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미켈란젤로 못지않게 다재다능하고도 미남이었던 23세 연상의 다 빈치는 자신의 열등감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미술가로 명성을 날리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늘 불행해했다. 

 

자신의 용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작품에서 종종 조잡한 인물에 자신을 투영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공인된 '성 안토니오의 고뇌'는 텍사스 켐벨 뮤지엄 소장품으로 2009년 6월 메트뮤지엄에 전시됐다가 2017년 미켈란젤로 드로잉전에 전시되고 있다. 

 

▶신동 화가: 어려서 미켈란젤로는 교회당의 그림을 베끼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준다. 아버지 루도비코조차 아들의 재능을 부인할 수 없었다. 열세살 때 아버지는 당시 유명화가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한다. 길란다이오는 미켈란젤로를 제자로 삼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까지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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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공인된 '성 안토니오의 고뇌'. 2009년 6월 메트뮤지엄에 전시됐다. 

 

▶스승과 제자 사이: 2009년 6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전시됐던 미켈란젤로 작 ‘성 안토니오의 고뇌(The Torment of Saint Anthony)’는 원래 지란다이오의 문하생 작품으로 알려졌다. 2008년 8월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 나온 것을 뉴욕의 아트딜러 아담 윌리엄스가 200만달러에 구입한 것. 윌리엄스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미술 복원사 마이클 갤러거에게 의뢰해 색감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재감정 결과 미켈란젤로가 12-13세에 그린 작품으로 판명됐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 전기에서 “15세기 독일 거장 마틴 숀가우어가 악마에 의해 고문당하는 성 안토니오를 묘사한 조각을 미켈란젤로가 그림으로 베낀 것”이라고 기록했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생선시장에 가서 색상과 비율을 연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이 완성되자 스승 지란다이오가 질투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대리석 속의 생명: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모든 돌 속에는 동상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난 대리석 안에서 천사를 보았고, 천사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깎았다.” 

“사람은 머리로 그리는 것이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바티칸-피에타.jpg 바티칸의 피에타상

 

▶피에타(Pieta)상: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1496년 스물한살의 청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리고 첫 번째 걸작 ‘피에타’를 제작하게 된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피에타는 성모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담았다.

 

미켈란젤로는 돌 덩어리에서 생생하고도 성스러운 성모와 예수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김기덕 감독은 2012년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사채업자들의 수금쟁이로 살아가는 고아 청년(이정진 분)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조민수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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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뮤지엄의 '피렌체의 피에타(The Deposition/"The Florentine Pietà")엔 자신의 얼굴을 묘사했다.

 


▶1천년 후에 누가 알까?: 로마에 머물며 피에타상을 마친 미켈란젤로는 4년만에 고향 피렌체로 금의환향했다. 피렌체를 통치했던 메디치(Medici) 가문의 위임으로 줄리아노 드 메디치와 로렌조 드 메디치의 조각을 제작하게 된다. 로마 장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완성된 두 메디치 남성은 실제의 얼굴과 달랐다. 

 

누군가 물었다. “왜 그들이 닮지 않았냐?”고. 미켈란젤로는 응수했다. “1천년이 지난 후에 누가 그걸 알겠는가?” 메디치 가문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미술가들을 후원하며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를 미화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초상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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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안 르네상스의 기념비적인 걸작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모나리자'. Photo: Sukie Park

  

▶다비드(David)상: 당시 피렌체는 공화정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자유를 상징할 수 있는 조각이 필요했다. 성경 속에서 거구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쓰러트린 양치기 소년 다비드는 힘과 맞서는 지성의 힘을 대표했다. 지성의 승리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04년 쓰고 남은 19피트 크기 대리석 안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청년 다비드상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인체의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드러났다. 미켈란젤로의 키는 5피트 4인치, 누드 남 다비드는 17피트 3인치. 미켈란젤로는 스물아홉살에 두 번째 걸작을 만들어낸다. 당시 피렌체의시뇨리아 광장에 서있던 다비드는 1873년 미술아카데미아갤러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광장엔 복사품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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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창세기'에서 '아담의 창조'.

 


▶천지창조/창세기(Genesis):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조각은 떼어내면서 만들어지는 것인 반면, 그림은 덧붙이면서 만들어진다.” 조각가로 명성을 떨치던 미켈란젤로는 1508년 서른셋의 나이에 율리우스 교황의 위임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장 프레스코화 ‘천지창조’를 그리게 된다. 프레스코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회화기법으로 상당한 기교와 순발력을 요구한다. 미켈란젤로는 젊은 나이에 시험대에 올랐다. 홀로 천장에 매달려 등장인물만도 300여명에 달하는 ‘천지창조’에 꼬박 4년이 걸렸다. 천장을 9개로 나눈 후 이를 34개로 분할했다. 

 

창세기에서 중앙에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그 주변으로 ‘12명의 예언자’ 삼각 모양의 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려져있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자신이 이 작업을 맡게된 것이 음모였다고 회고한다. 바티칸의 성베드로(St. Pietro) 대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와 라이벌 화가 라파엘로가 조각가론 유명세를 떨쳤지만, 그림 실력이 입증되지 않은 자신이 실패하는 것을 보기 위해 교황을 부추긴 것이라고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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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심판'에서 오른쪽 가죽 안의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 ‘천지창조’ 완성 후 로마를 떠난 미켈란젤로는 1534년 로마로 돌아온다. 이미 쉰아홉이 된 노장은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명으로 ‘최후의 심판’ 프로젝트에 임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묵시적인 세계를 묘사한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벌거벗고 있다. 동성애자로 알려진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근육미를 강조하는 누드를 통해 신의 인간화, 인간의 신격화를 추구했다. 여성의 가슴이 마치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도 대부분 남성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 성 바르톨로뮤가 들고 있는 벗겨진 가죽 속의 일그러진 얼굴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기저귀 화가’ 등장: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자 추기경들은 거룩한 성당에 나체화가 불경스럽다고 반발했다. 추기경들의 탄원에도 교황은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1564년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 다 볼테라가 그림 속 성기를 모두 가리는 작업을 해버린다. 때문에 다니엘은 ‘기저귀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로 교계에선 모든 종교화의 치부를 덮어 가리는 ‘무화과잎 캠페인(Fig Leaf Campaign)’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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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베드로성당. 라파엘로와 브라만테도 디자인에 가담했다. Photo: Sukie Park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가: 1546년 미켈란젤로는 세계 최대 성당이 될 성베드로 성당 건축자로 임명했다. 미켈란젤로는 돔이 완성을 보지 못한 채 88세로 사망한다. 자신의 생일(3월 6일)을 3주 앞두고 로마에서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다.  

 

 

DP826907.jpg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장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Studies for the Libyan Sibyl (recto); Studies for the Libyan Sibyl and a small Sketch for a Seated Figure (verso)

  

 

▶완벽주의자: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드로잉/스케치 대부분을 태워버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2007년까지도 바티칸의 자료실에서 그의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용으로 그린 스케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괴퍅한 남자: 사람들은 당대의 최고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미켈란젤로를 '신성한 남자(Il Divino)'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변에선 깐깐하고, 괴퍅한 성격의 소유자로 전해진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그의 손에서 성모와 예수, 그리고 죄인들이 탄생했다. 공공연하게 부패한 신부들을 비판했던 미켈란젤로는 그러나, 남성 누드의 아름다움에는 약해지곤 했다.  

 

▶신성한 라이벌, 레오나르도: ‘모나리자’와 ‘다비드’, ‘최후의 만찬’과 ‘최후의 심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23세 연하의 미켈란젤로는 당대 쌍벽을 이룬 미술가들이었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예상대로 두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서로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leonardo-vs-michelangelo.jpg 레오나르도(왼쪽)와 미켈란젤로

 

대리석을 들고 싸울 뻔 하다가 만든 것이 다비드상이 됐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좋건 싫건 간에 레오나르도를 연구했고, 그에게 영감을 받은 제스처가 ‘카스치나의 전투’의 벽화에도 나온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근육질 남성 누드에 대해 '호두가 담긴 가방(a bag of walnut)'같다고 조롱했다고 전해진다.  

 

▶연애 시인: 미켈란젤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로 알려졌다. 1543년 체키노 데이 브라치를 만났지만, 1년 후 죽어버렸다. 미켈란젤로는 브라치에게 장장 48편의 장례시를 헌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켈란젤로를 성적으로 이용해 돈을 갈취한 모델 청년들도 수두룩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미켈란젤로는 1532년 23세 연하의 토마소 데이 카발리에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카발리에리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부자 화가, 가난한 마음: 미켈란젤로는 부와 명예를 쥐고 살았다. 여든여덟살, 그가 최후의 숨결을 향해갈 무렵 그의 궤상자엔 금으로 가득했다. 어느날 미켈란젤로는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에게 말했다. “난 부자였지만, 난 늘 가난뱅이처럼 살아왔다.” 콘다비는 스승이 “음식과 술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생리적 필요에 의해 먹었으며, 종종 옷과 신발을 신은 채로 잤다. 그래서 주변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술회했다.

 

▶최후의 미완성 조각: 미켈란젤로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제작했던 조각이 예수가 마리아의 품에 안긴 'Rondanini Piet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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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주카로의 미켈란젤로 초상(왼쪽)과 다니엘레 다 볼테라의 미켈란젤로 두상. 코가 납작한 모습이 적나라하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뉴욕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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