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비밀 100 (21) 1883년 브루클린 브리지를 처음 건넌 그녀 에밀리 로블링(Emily W. Roebling)
Secrets of New York <21>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시대를 앞서간 여성 엔지니어, 브루클린 브리지 완공
뉴욕의 상징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는 '세계 제 8대 불가사의(Eighth Wonder of the World, 마추픽추/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멕시코 치첸이트사 마야 유적지/ 만리장성/ 타지마할/ 페트라/ 콜로세움 )'으로 불리운다.
1869년 착공, 14년 후인 1883년 5월 24일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브루클린 포함)를 잇는 유일한 육로가 대대적으로 개통됐을 때 처음 건넌 사람은 수탉을 안고 마차에 앉은 여인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1843-1903)이었다. 그녀는 브루클린 브리지 설계자였던 시아버지 존 로블링(John Augustus Roebling, 1806-1869)가 사고로 사망한 후 바통을 이어받은 남편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Augustus Roebling, 1837-1926)마저 몸져 눕자, 자신이 벌떡 나서서 브루클린 브리지 건축을 지휘한 여장부였다.
존 A. 로블링(1806-1869)/ 워싱턴 A. 로블링(1837-1926)/ 에밀리 워렌 로블링(1843-1903)
미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페티코트를 입고 다니던 양가집 여성이 건설 현장에 드나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대였다. 에밀리 로블링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대신해 10여년간 수학, 공학, 과학을 독학하면서 브루클린 브리지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했다. 에밀리 로블링은 엔지니어의 부인이 아니라 자신이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나, 에밀리 로블링의 이름은 오랫동안 존과 워싱턴 로블링 부자의 그림자에 가려졌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역사가 백인남성 위주의 스토리였음에 반성하는 새로운 챕터로 들어섰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시인하면서 2018년부터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사망기사를 새로이 실었다. 그중 한명이 한국의 유관순 열사(1902-1920)였고, 에밀리 로블링의 부고로 그녀의 삶을 재조명했다.
에밀리 로블링, 1864/ Charles Émile Auguste Carolus Duran(1838–1917), Emily W. Roebling, 1896, Brooklyn Museum collection
에밀리 워렌은 1843년 업스테이트 뉴욕의 콜드스프링에서 12자녀 중 11번째 아기로 태어났다. 아버지 실바너스 워렌은 뉴욕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비지테이션 아카데미(현 Georgetown Visitation Preparatory School)에 다니면서 가사, 바느질, 역사, 천문학, 프랑스어, 대수학 등을 공부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장교였던 오빠 거베너의 사령부에서 부하였던 워싱턴 로블링을 만났다. 1865년 초 에밀리와 워싱턴은 콜드 스트링에서 결혼했다. 시아버지 존 로블링이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를 이어줄 유일한 육로인 브루클린 브리지(초기 이름은 'Great East River Bridge')를 설계할 무렵 신혼부부는 유럽으로 케이슨 병(Caisson, 고압의 물속에서 몸안에 축적된 질소가 배출되지 않아 몸속에 기포를 만들어 생기는 잠수부병)에 대해 공부하러 갔다. 에밀리는 이듬해 독일에서 아들 존 A. 로블링 주니어를 출산한다.
Brooklyn Bridge under construction
1869년 건축이 시작된 지 며칠 후 존 로블링이 공사장을 감독하던 중 브루클린 피어의 말뚝에 발을 부딪히면서 파상풍에 걸렸고, 1개월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이에 그의 아들 워싱턴이 수석 엔지니어를 맡아 공사를 진행했다. 워싱턴은 1865년부터 1867년까지 브루클린 브리지의 축소 모델인 신시내티 커빙턴 브리지(현 John A. Roebling Suspension Bridge)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워싱턴 로블링은 1870년 케이슨병에 걸려 반신불수에 시각, 청각을 잃었으며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이 케이슨병으로 최소 24명의 인부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에밀리 로블링이 다리 공사 지휘자로 나서게 됐다. 처음엔 비서로 시작해 남편의 눈과 귀가 되어서 모든 것을 기록했다. 브루클린 하이츠의 집(110 Columbia Heights)와 공사 현장을 고가면서 공급 자재 구입에 협상을 하고, 계약을 감독했으며, 이사회의 연락책까지 맡았다. 또한, 당시 독립된 도시였던 브루클린 시장 등 반대 정당이 남편을 프로젝트에서 해고하려하는 책략을 뛰어난 외교 기술로 저지시켰다. 한편, 로블링은 자택에서 망원경으로 공사의 진행상황을 지켜보았다.
브루클린 브리지 개통날의 축제 광경 Lithograph of the opening of the Brooklyn Bridge/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Brooklyn Bridge, 1883
1883년 5월 24일 마침내 브루클린 브리지가 개통되자 에밀리 로블링은 수탉을 무릎에 앉힌 채 마차를 타고 체스터 아서 대통령과 함께 다리를 횡단했다.
워싱턴 로블링은 개통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뉴욕시와 브루클린시는 동시에 거대한 불꽃놀이 팡파레를 벌였다. 개통 첫날 브루클린 브리지에는 1천800대의 차량이 지나갔으며, 15만300명이 건넜다.
뉴욕타임스는 "어떻게 브루클린 브리지 엔지니어의 부인이 남편을 도왔는가(How the Wife of the Brooklyn Bridge Engineer Has Assisted Her Husband)"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뉴욕대 법학과 졸업 후 에밀리 로블링, 1899
브루클린 브리지 완공 후 에밀리 로블링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블링 부부는 뉴저지 트렌톤으로 이주했다. 에밀리는 1893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위한 뉴저지여성매니저 이사회의 통계위원회, 미국혁명의 딸들 모임, 조지워싱턴추모협회, 스페인-미국 전쟁 중에는 구호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896년 영국을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으며,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짜르 니콜라스 대관식에 참석했다. 공부도 계속했다. 뉴욕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뉴욕주 올바니 법학 저널에 '부인의 장애(A Wife's Disability'(1899)를 기고했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성차별을 비판했던 에밀리 로블링은 남편의 이니셜 W. A. R.로 서명했다.
에밀리 로블링은 190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 나이 59세였다. 남편 워싱턴은 말년에 케이슨병 후유증과 싸우면서 미네랄 광석 수집가로 여생을 보내다가 1926년 89세로 눈을 감았다. 1920년에야 미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되며, 미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게 된다.
브루클린 브리지에는 존, 워싱턴, 에밀리까지 3명의 로블링에게 헌사하는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 2018년 로블링 부부가 살던 브루클린 하이츠의 컬럼비아 하이츠와 오렌지 스트릿 교차로에는 'Emily Warren Roebling Way'로 명명됐다. 로블링 부부가 한때 살았던 뉴욕주 트로이의 렌셀라 폴리테크닉대학교(Rensselar Polytechnic University)에선 공학전공 여학생을 대상으로 에밀리 로블링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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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로블링을 읽고, 2021년 6월에 댓글을 올렸습니다. 오늘 또 그녀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에밀리의 초인적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서있는 사진을 뚫러지게 봤습니다. 그녀의 꼭다문 입과 매서운 눈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결의가 뚜렸하게 보였습니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탄생시킨 불굴의 의지를 눈빛에서 보았습니다.
-Elaine-
브루클린 브리지에 대한 역사를 소상히 알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무심코 지나다녔던 다리가 이렇게 기구한 역사를 담고있었다니 이제는 깊이 감사하면서 다니겠습니다.
브루클린 브리지에는 에밀리 로블링이란 위대한 여성이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컬빗을 통해 알았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지적 능력과 일에 대한 열정이 읽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합니다. 한 여자 엔지니어의 무한대의 지식과 성취욕이 일궈낸 결과물에 탄성을 보낼뿐입니다.
숙희 후배님이 사시는 동네가 그녀가 사신 동네였어서 거리 이름을 그녀의 이름으로 했다니 자랑스런 동네에 사심을 축하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유관순 애국지사가 사시던 고향 천안에 유관순 거리가 있지요? 모교인 이화여고에는 유관순 기념관이 있습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