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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마이클 갬본, 아일린 앳킨스, 로저 리스가 주는 황홀경 

'The Winslow Boy' 'All That Fall' 

2013-11-13-AllThatFall-thumb.jpg All That Fall

최근 브로드웨이 뮤지컬 ‘애니’에 출연했던 장준아(Junah Jang)양을 1년 만에 만나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연극이 초등학교의 특별활동이나 선택이 아니라 필수과목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됐다. 11살 소녀 장준아양의 정신력과 적응력, 프로페셔널리즘을 길러준 브로드웨이는 인생 학교같았다. 

심리학에서도 역할 놀이(role play)가 타인을 이해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지만, 자가 분석(self-analysis)도 가능하며, 자아의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연극/연기(theater/acting)는 음악, 미술처럼 인간성을 탐구할 수 있는 예술임에 틀림없다.

영화과 대학원 시절 연극 과목을 필수로 들어야 했을 때 뉴욕에서 유학하고 오신 교수님이 독백을 선택해서 외워 연기하라는 숙제를 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독백은 이상하게도 질펀한 술집 아지매 역이었지만,  ‘신의 아그네스’ 중 닥터 리빙스턴을 택했다.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터이다. 아그네스 수녀도 아니고, 얼마나 재미없는 역이었나? 

무대에 오르는 건 완전히 벌거벗는 일이다. 옷도, 자아도 벗어 던지고, 그 역할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몸도 재능도 따라주지 않았다. 교수님은 이처럼 자아를 벗지 못하는 무거운 학생들에게 줄넘기도 시켰다.

winslowboy3.jpg The Winslow Boy

뉴욕에 온 후 컬럼비아를 거쳐 버룩칼리지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배우 출신 남자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스 출신으로 기억되는 선생님은 말을 너무도 빨리 하는 스페인 여학생에게 뜨개질을 하면서 말해보라고 했다. 그녀는 교실에서 실제로 뜨개질을 하면서 영어를 했다. 얼마나 진기한 발상인가? 모두 연기자 훈련법에서 나오는 테크닉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한국어가 편한 뉴요커는 브로드웨이도 연극보다 뮤지컬이 가깝다. 부담스러운 연극이지만, 가끔씩 보고 싶은 이유는 불꽃 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극장에서 보는 건 정말 황홀하기 때문이다. 대사를 100%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몸에서 파장되는 연기의 진수는 짜릿한 체험을 주기도 한다. 노래와 춤으로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의 애증, 절망, 고독의 깊이를 품어내는 배우들이 있는 곳이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다. 그들이 주로 영국에서 온 베테랑 배우들이라는 것이 공통점이기도 하다.

최근 공연이 끝나가는 두 편의 연극을 보면서 이런 황홀경을 느낄 수 있었다. ‘윈슬로우 보이(The Winslow Boys)’’와 ‘올 댓 폴(All That Fall)’은 지난해 런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후 올 가을 뉴욕에 입성했다. 

라운드어바웃 시어터 컴퍼니(Roundabout Theater Company)가 아메리칸 에어라인 시어터에 올린 ‘윈슬로우 보이(The Winslow Boy)’는 1946년 테렌스 래티건의 작품을 리바이벌했다. 

연극 '윈슬로우 보이'와 로저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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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Joan Marcus


‘윈슬로우 보이’는 런던 은행가 집 거실이 배경이다. 완벽하게 행복한 이 가정에 어느 날 해군사관학교생인 둘째 아들 로니(스펜서 데이빗 가포드 분)이 퇴학당하고 집으로 온다. 머니 오더(5쉴링)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아버지 아서 윈슬로우(로저 리스 분)은 아들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해 투쟁하게 된다.
 
상류층 가정이 겨우 5실링을 둘러싼 아들로 인해 몰락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딸의 약혼은 파기되고, 일급 법정 변호사 비용에 명예가 추락하며 겪는 가족의 갈등과 위기가 생생하게 보여진다. 

winslow-boy1.jpg The Winslow Boy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 로저 리스(Roger Rees, 69)는 완고하며 대쪽 같은 지존의 아버지에서 잃어버린 명예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쇠약해져가는 아버지 아서 윈슬로우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로저 리스의 눈짓에서 발걸음까지 그리스 비극 속 인물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실화에 바탕으로 두었다는 ‘윈슬로우 보이’의 실존 인물은 결백이 입증됐지만, 제 1차 세계대전에서 19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진실과 정의를 찾으려 매달렸지만, 현실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연출가 린제이 포스너는 런던 은행가 집안의 거실을 배경으로 때론 법정 반대신문의 현장으로 이끌면서 한 가족의 명예와 돈, 정의 문제와 그 희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만한 희생을 감당하면서라도 과연 진실과 정의를 수호할 가치가 있을까요?


'올 댓 폴'의 아일린 앳킨스와 마이클 갬본


Samuel_Beckett_2177862b.jpg Samuel Beckett


불후의 걸작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을 쓴 사무엘 베켓은 ‘부조리극의 대가’로 불리운다. 
대학원 시절 교내 극장에 달랑 앙상한 겨울나무 한 그루 아래 두 남자가 대화하는 난해한 연극. 그것이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베케트 ‘부조리극’의 실체였다. 

베케트는 1957년 BBC 라디오 방송국 대본(radio play)으로 ‘추락하는 모든 것들(All That Fall)’을 썼다. 그런데, 라디오 대본이기에 연극 무대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스웨덴의 명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연극화하려고 베케트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로렌스 올리비에경도 찾아가 간청했지만 대답은 ‘No’였다. 음향효과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라디오 대본을 연극으로 공연하는 것은  1989년 베케트 사망 후에도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였다.

그런데, 마침내 아일랜드의 극단 판판(Pan Pan)이 베케트의 본의를 존중하는 조건으로 연극 공연 승인을 받았다. 라디오 방송국의 녹음실이 무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올 댓 폴'은 2011년 8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트레버 넌(Trevor Nunn)의 연출로 초연됐다.

iE.sdM4tK0eg.jpg All That Fall

그리고, 올 11월 오프브로드웨이 59E59 시어터 무대에 올려졌다. 베케트 연극에서 드물게 여성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올 댓 폴’에선 아일린 앳킨스(Eileen Atkins, 79)와 ‘그레이트 갬본(The Great Gambon)’으로 불리우는 마이클 갬본(Michael Gambon, 73)이 부부로 등장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이 스토리도 기다림과 절망스런 실존에 관한 이야기다. ‘괴퍅한 할망구’ 루니 여사가 장님인 남편 미스터 루니를 기차역으로 마중하러 가는 길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난다. 이 노부부에겐 딸을 잃은 기구한 사연이 있다. 남편의 기차는 연착되고, 뒤늦게 도착한 남편과 아내는 기차가 늦게된 이유를 알게 되고 경악한다.

All-That-Fall1-600x567.jpg All That Fall

무대엔 10개 남짓의 마이크가 달려 있고 세트라고는 달랑 자동차의 문 입구를 단순화한 장치뿐이다. 양쪽 가장자리의 의자엔 등장인물들이 앉아 있다. 배우들이 대본 들고 연기를 하기에 마치 오디션이나 대본 낭독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발걸음 소리, 기차, 자동차, 바람, 비 소리가 어릴 적 라디오 방송극을 듣던 때를 상기시킨다. ‘아차 부인, 재치 부인’… 라디오의 매력은 청취자에게 이미지를 상상하도록 여유를 준다는 것. 그래서 독서처럼 자유로운 상상의 여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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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그리고 79. 마이클 갬본과 아일린 앳킨스의 노련한 연기가 압권인  'All That Fall'.


베케트 식의 부조리하면서 냉소적인 설왕설래 대사가 오간 후 뒤늦게 지팡이를 든 남편이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아일린 앳킨스와 마이클 갬본의 연기는 불꽃이 튀면서 객석이 감전된듯한 혼미한 상태로 전이시킨다. 갬본의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 톤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등장한 것처럼 무대를 장악한다. 앳킨스의 히스테리컬한 표정도 더욱 강화되면서 두 노인 부부의 압도적인 연기가 길게 메아리쳐진다.

아이리쉬 마이클 갬본, 영국 출신 아일린 앳킨스… 뉴욕타임스의 벤 브랜틀리가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들’이라고 평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전설적인 연기를 이 작은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행운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브로드웨이에 리바이벌됐다. 베케트의 영향을 받은 해럴드 핀터의 '무인지대(No Man's Land)'와 함께 브로드웨이 코트 시어터에서 번갈아 공연된다.  이안 맥켈런과 패트릭 스튜어드, 베케트와 핀터의 만남을 브로드웨이에서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http://www.twoplaysinre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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