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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5) 김희자: 아우라 찾아 떠난 유럽 여행 [김희자/바람의 메시지]
  • sukie
    Oct 23, 2017
  • 바람의 메시지 (25) 보헤미안 드림 Bohemian Dream <1>


    아우라 찾아 떠난 유럽 여행


    나는 집시여인이 되어 한송이 붉은 장미를 입에 물고 수겹의 프릴 스커트를 흔들며, 손 끝에는 캐스터네츠와 함께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에 온몸이 관통되어 신들린듯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삥 둘러 서서 박수 소리와 발 장단을 맞추며 환호하는 소리에 놀람으로 깨어났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참 생각을 했다. 너무 자주 잠자리가 바뀌며 생기는 혼돈경이 아닌가 싶다. 동유럽 보헤미아 지역엘 여행한 자의 무의식에 묻어온 집시여인들의 그림이 만든 몽상이려니 하고 얼굴의 땀을 닦으며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20170503_182809.jpg 호엔잘츠부르크성 아래 광장에서


    언제나 어김 없이 지구의 반대편 쪽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소위 젯트랙(jet lag)이라 부르는 혼란의 틈새 속으로 빠진 시각이다. 지구 위 동과 서의 거리를 너무 빨리 달려오기 때문에 느낀다고 하는 생체리듬의 부적응 증세로, 남북으로의 여행에서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밤과 낮의 일조량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생체 시계가 환경과 엊박자를 내어서 사람에 따라 일주일 정도는 곤욕을 치루게 된다고 한다. 빛과 생체 리듬을 생각하며 불가지한 내 한개의 자연물인 몸둥아리를 다시 새삼스레 느껴본다. 좀더 잠을 청하려 애를 쓰며, 하늘을 내다 보니 검고 맑은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고, 하현달이 물끄러미 미소를 띠며 나를 내려다 본다. 


    몇해 전 두어달 서울에 갔다가 뉴욕에 돌아와서 '갈라 서자'까지 갔던, 나의 여행 자유권을 위해 쟁탈전을 벌인적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여행을 기피하는 남편과의 전쟁을 치룬 후 한번 여행은 한달 미만이라는 조건의 협상이 된 후로는 해마다 최소 두어번 씩 혼자 여행을 하고 올 수 있게 됐다. 달포의 여행에서 돌아오면, 목빼고 기다리던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도 참을 수 없게 쌓인 피로로 짬만 나면 마치 졸림 자루 속에 갖혀 묶여진듯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사오일 정도는 '슬리핑 비유티(Sleeping Beauty)'니 하며 마누라가 돌아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여서 그리움이서린 빈정댐과 함께 칭얼거리듯 하다가 남편이라는 이름의 본색을 들어 낼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시차 생리시계가 조율이 끝내지도 못한 체 일상의 본업으로 돌아가곤 한다.

     


    20170503_182716.jpg 호엔잘츠부르크성 아래 광장에서


    어둠 속, 뜨인 눈으로 우투커니 누워서 다시 돌아올 일상이 있다는 것과 내 침대가 최고로 편하고 안락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마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전장치가 있기에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겠는가 싶어 모든 것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 크고 화려한 쇤브룬 궁전에 살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그 화려하고 굉장한 침대가 이만큼이나 안락했을 수 있었을까 하며 잠 속으로 말려 들었다. 나는 그넓고 만개하여 흐드러진 꽃으로 가득하여 향그럽고,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분수하며 아름다운 궁전의 정원에서 막 연주회를 끝내고 낄낄대며 젊은 연인과 숨바꼭질을 하는 모짜르트를  멀리서 그림자처럼 훔쳐 보고있는 늙은 살리에르를 보았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이 어디서 솟아나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질투심으로 불태우며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살던 궁정 음악가의 너무나도 불쌍한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었다. 


    나는 못본 척 다시 꽃길을 산책하며, 여왕님 그녀는 너무도 바빠서 아마 이 정원을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기나 했을 뿐 몇번 걸어 보지 도 못했을꺼라 여겨졌다.그 뚱뚱한 몸에다가 어마무시한 드레스로 과연 산책이나 가능 했을까. 또한, 왕으로 결정해야 할일들에, 어미로써 아이들과 나눠야할 시간, 여자이기에 배가 빌날이 없었을 것같은 16명의 아이를 출산한 여왕벌 노릇은  과연 행복 했을까. 그 많은 자식들은 전유럽을 다스리게 하고자 계획에 의해 생산을 한걸까, 아니면 낳았고 길렀으니 유럽전반에 포진을 시키게된 걸까? 그녀의 마음 속을 어찌 누가 알며 그녀의 뛰어난 권모술수를 누가 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수 많은 아들 딸들의 얘기들이 중세 역사 속에서 찬란하지만, 막내 딸이 그 악명 높은 마리 앙투아네트 였다. 그 대단한 여성들 옆의 남자들은 어떤 느낌으로 살았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건너편 나무숲에서 백명도 더 될 마리아 테레즈의 손주들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겟아웃! 겟아웃!" 삿대질을 하며 알 수 없는 아우성과 돌질까지 해서 나는 도망을 치며 헉헉대다가 드디어는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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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  구시가지에서

                                  

    휴, 하며 몸을 일으키니 또 다시 잠깐 비몽사몽사이에 빠져 든거였다. 날이 밝아지려는 기색도 보이고 하니 일어났다. 이것저것 여행에서 가져온 자료와 스마트폰으로 찍은 500장이 넘는 사진을 복습하듯 뒤적거려 본다.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었던 체코의 프라하.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를교를 걸으며 찍은 풍경 속, 솟아있는 조각상들 뒤의 하늘을 보며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던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라는 음률을 흥얼댔었던 나 자신이 기억났다. 내가 프라하엘 가고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그 음악가들에 대한 흠모로 그들의 아우라를 느껴 보고싶었던 거다. 드보르작과 야나체크, 리스트를 연속 떠올리며 모두가 체코인들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는 자기가 나고 자란 땅의 기억이 배여서 알게 모르게 지역성이 내포되어있다. 쇼팽이 파리에서 살면서도 폴란드에서  태어난 육감이 꿈틀대고, 브람스 또한 아다지오 템포의 두터운 선율 속에 북독일의 함부르크의 느낌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녹아있는 러시아의 가난한 광산촌의 구름 낀 어두움이 연상되어진다.

                                                                                                                

    나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차 속에서나 작업실에서 늘상 들리는 클래식CD  뮤직에 대해 루마니안 친구는 어째서 폴랜드나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보헤미아 쪽 음악을 좋아하냐고 내게 물었던적이 있다. 글쎄, 나와 그들의 감성대가 같은가 부지하며 함께 웃을수 밖엔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무어라 꼬집어 말할께 없긴 마찬가지이지만 내 천성과 관계된 일인지, 아니면 내 조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동일성인지 연구 해봐야할 것 같다. 


          

    20170509_171035.jpg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에서


    여튼 전문 음악인 에게 비유하자면 어린이 수준 밖에 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내 나름으로 클래식 음악은 나의 호흡과 함께 음율로 맥박이 뜀으로 평안함을 느껴왔다. 바하에서 베토벤, 모짜르트 그리고 체코의 음악들이 내 피 속으로 떠다니며 영감과 위안을 받아왔고, 그들의 나라의 아우라를 느끼고 싶엇다. 또한 소설가와 철학자 사상가들은 내 영혼을 키워주었기에 더욱 강한 인력으로 나를 끌여들였지만, 내 정체성의 서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풀려날 때까지 오래 오래 망설였다.


    그리고, 독일을 기준으로 얼마나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내속에서 나를 교육시켰던가를 아는지라 그들이 살던 곳을 오래 동경했었다. 나는 그들이 태어나고 살았다는 그곳의 자연 풍광 속 하늘과 바람을 느껴고 싶었다. 30대에 내 인생의 뼈대를 세워준 니체가 불교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에 감응을 입었기에, 신이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한 부정적인 현대인들의 정신에 자양분이 되고, 삶의 주인이 되어사는 능동적인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었다. 인간이 신을 창조해 냈을뿐, 신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으며,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가야한다는 내가 심취해 있던 선불교적 결론과 일치했기에,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고 중력으로의 관습을 거역하고 날아올라 생의 춤을 추라고 한 자유로운 작가로의 삶을 살수 있었다.



    20170509_170817.jpg 히틀러가 최초로 연설한 테라스


    서양문화로 길들여지긴 했지만 내뼈 속에 흐르는 골수가 동양 본성의 엣센스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과 그 원천에서 솟아나는 동양관습과 철학적 사유가 바로 내 생의 면역체였음을 알아차렸기에 극복은 되었지만, 정말 너무 오랜 동안 문화적 정체성과  열등의식이 나를 괴롭혔던것 같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투어지만 양해를 구하고, 괴에테가 살았다는 곳에 혼자 방문을 했다. 마치 그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내 젊은날의 슬픔이 실체가 없는 허망한 몽환일 뿐임을 다시 확인했다. 어쩌면 이젠 내 나이가 인생이 다만 꿈이요, 한낮 풀잎 위의 이슬일 뿐임을 터득했기 때문일테지만. 


    히틀러가 첫 연설을 했다는 광장에서 그의 절규가 거울에 반사되어 에코처럼 광장을 메우는 것 같은데, 내가 서있는 곳 위에 한 동상이 있어서 보니,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영령을 추모하는 조각비였다. 여러 곳의 유대인수용소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인간 역사의 부침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수없는 성당 건축물과 궁전들 구경을 했지만, 하느님을 찬양하는 자들의 피땀 만이 느껴질뿐 내 가슴에 스며든 것은 역시 그 세월속에 농축된 인간들의 슬픔과 고통과 공허를 절묘하게 작품화하여 놓여진 현대 조각들이었다. 대단한 명성을 얻었는지 못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시나 잡지에서 가끔 본듯한 조각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들의 모국인 보헤미아 지역 사람 특유의 피 속에 흐르는 허허함이 내 가슴을 후비듯 찌릿하게 전해졌었다. 옛것들만 기대하며 걷는 내 앞에 얘기치않은  황당스러운 만남이준 감동이기도 했을꺼다.


                           

    20170509_174934.jpg 아우슈비츠 메모리얼

            

    이번 여행을 통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해야  정직한 고백일 꺼다.  미술과 관계된 것들에선 미술사와 더불어 배운 지식이 있고, 작품 그자체로 남아 있었기에 확인의 기쁨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건축물들 그 수많은 각종 양식의 성당 건축들은 그 숫자에 멀미가 날 정도였다. 물론 수많은 세월에 셀 수 없이 곳곳에 지어진 그 많은 성스러운 건축물 속엔 무겁고 두꺼운 먼지색 적막만을 접했다. 어디 한곳 파이프 오르간에서라도 바흐의 종교적 음율한 가닥이라도 퍼져 나왔더라면, 비록 교인이 아닐지라도 천국을 엿볼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상상해 보았다. 바로크 양식에서부터 르네상스 양식까지를 보여주는 천년동안 지어서 완성되었다는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은 그 모습에서도 가히 가우디의 미친 영감의 모태 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었다.

      

    비엔나에서 저녁에 작은 실내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그 나름 아름다운 연주를 보고듣곤 했지만,음악은 완벽한 조건을 갖춘  연주장이 아니면, 고품격의 연주를 들을 수가 없겠다는 결론이 났다. 클래식 뮤직 DVD나 고음질 라디오 보다도 못했다 하면 무식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HDTV 때문에 왠만한 퀄리티의 사운드와 비주얼이 아니면 경쟁이 불가하다. 어떤 지인은 이젠 몸이 따라주질 않아 멀고 고된 여행을 가느니, 한번 여행 다녀올 돈이면 충분하다며 80인치 곡면 TV와 별도 사운드 트랙을 부착하였다며 황산 구경을 시켜주었다. 드론으로 촬영 한 온갖 유명 관광명소를 보고 있노라니 그보다 더 행복한 천국이 없다고 자랑을 하는게 수긍이 되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그 지인 앞에서 원시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내가 걸을 수 있다면 세상 어디라도 갈 것이고, 나는 플리트비체(Plitvice)는 꼭 가볼 것이다라고 결심을 했다. 이 세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그곳일 것같은 영감을 받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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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 

    http://wheiza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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