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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5) 박숙희: 조지아 오키프의 뉴욕 [박숙희/수다만리]
  • sukie
    Mar 14, 2017
  • 수다만리 (18) 스티글리츠와의 전설적인 만남

    조지아 오키프의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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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ia O’Keeffe, Brooklyn Bridge, 1949/ Alfred Stieglitz, Georgia O’Keeffe, 1918


    꽃과 사막, 뼈다귀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Totto O'Keeffe, 1887-1986)는 오랫동안 뉴멕시코 산타 페의 여인으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오키프가 공부하고, 사랑하고, 비판받고, 명성을 얻게된 도시는 뉴욕이다.

    1887년 위스컨신주의 선 프레이리에서 태어난 오키프는 12살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5살 때 가족이 버지니아주로 이주했고, 오키프는 2년 후인 1905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유학했다. 이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휴학한 후 1907년 뉴욕으로 왔다. 

    맨해튼 57스트릿 뉴욕아트스튜던트리그(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윌리엄 메릿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의 지도를 받았다. 얼마 전 보스턴미술관에서 100주기 추모전이 열린 체이스는 조지 벨로스, 찰스 디무스, 마스덴 하틀리, 존 마린, 조셉 스텔라 등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듬해 오키프는 스승의 스타일을 따라 그린 '죽은 토끼와 청동 주전자'를 그려 윌리엄메릿체이스 정물상을 수상한다. 이 장학금을 받고 업스테이트 레이크조지의 섬머스쿨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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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ia O'Keeffe, Untitled, Dead Rabbit with Copper Pot, 1908,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collection

    미술학생 시절 오키프는 갤러리를 순방했는데, 유명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운영하던 갤러리 291(5애브뉴 30스트릿)의 로댕 드로잉전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오키프는 스승의 스타일을 복사하는 그림을 추종하는 전통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고,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앓아눕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친척이 있던 시카고의 회사에서 상업미술가로 돈을 벌었다. 이후 버지니아주의 모교에서 가르치면서 버지니아대 섬머스쿨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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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fred Stieglitz and Georgia O’Keeffe, 1936


    조지아 오키프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은 사진작가, 아트딜러이자 남편이 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일 것이다. 하지만, 스티글리츠를 만나기 전 그녀의 유니크한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준 인물은 철학자 아서 웨슬리 도우(Arthur Wesley Dow) 교수였다. 1912년, 오키프는 버지니아대학교 섬머스쿨에서 그의 강연을 듣게 된다. 파리에서 유학했고, 일본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도우는 '공간을 채우는 아름다운 방법으로써 선(line), 톤(tone), 색채(color)의 파워'에 대해 역설했다. 그리고, "자연을 복사하는 대신, 소재에 대한 지식과 역사 또는 정확도 대신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라고 가르쳤다. 

    오키프는 그의 미학에 매료되어 2년 후엔 도우 교수가 학장으로 있던 컬럼비아대 사대에 등록해 공부한다. 이즈음 스티글리츠의 291 갤러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 전시회도 관람했다. 이후 오키프의 부드럽고, 소녀 취향의 그림은 목탄화의 대담한 선과 나선형 모양의 수채화로 바뀌게 된다. 오브제를 사실적으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키프의 유니크한 모더니즘 페인팅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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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칼리지의 조교를 거쳐 텍사스의 공립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목탄을 사용한 추상드로잉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오키프는 컬럼비아교육대 동창인 아니타 폴리처에게 그림을 보냈고, 폴리처는 1916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291 갤러리로 가져갔다.  사진을 예술로서 자리매김하는 전시회를 열고, 피카소의 첫 뉴욕전, 로댕의 드로잉전을 열며 유럽의 모던아트를 소개해온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드로잉에 홀딱 반한다. 

    1917년 4월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녀의 목탄화 10점을 전시한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에게 항의하러 찾아갔다가 23세 연상의 유부남 스티글리츠의 열정에 놀란다. 하지만 이때 오키프는 이미 사진작가 폴 스트랜드(Paul Strand)와 사귀던 중이었다. 텍사스로 돌아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편지를 받는다. 그해 여름 오키프는 동생 클라우디아와 콜로라도를 여행 후 텍사스로 돌아가다가 들른 뉴멕시코의 산타 페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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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fred Stieglitz, Georgia O’Keeffe with watercolor paint box, 1918

    한편, 스티글리츠는 스트랜드에게 자신이 오키프에 빠져있다고 고백했고, 스트랜드는 오키프를 포기한다. 이후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에게 하루에도 몇통씩 장문의 편지를 오키프에게 보내게 된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소울 메이트, 쌍둥이를 찾아왔고, 양조회사 상속녀 에밀리와의 결혼을 후회하고 있던 스티글리츠 인생의 여인이 나타나며, 삶의 새로운 챕터에 들어간다.  

    1918년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뉴욕 레지던시 작가로 초대한다. 스티글리츠는 아내가 외출한 사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오키프의 누드 사진을 찍다가 들켜 쫒겨났다. 그리고, 한달 만에 이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뉴욕의 파워 아트딜러 스티글리츠 서클에서 오키프는 찰스 디무스, 아서 도브, 마스덴 하틀리, 존 마린, 폴 스트랜드, 에드워드 스타이켄 등과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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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fred Stieglitz, Portraits of Georgia O’Keeffe, 1917-1925


    스티글리츠는 1917년부터 오키프의 얼굴부터 손, 그리고 음부까지 그녀의 몸을 부분적으로 포착하는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리고, 1925년까지 350여점의 오키프 사진을 남겼다. 1921년 2월 앤더슨갤러리에서 오키프를 모델로 한 스티글리츠 사진전이 열리자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누드에 경악했다. 스티글리츠는 1923년부터 거의 매년 오키프 개인전을 열면서 그녀의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아주었다.

    1921년 2월 앤더슨갤러리에서 스티글리츠 회고전(1886-1921)이 열리고, 45점의 오키프 사진 중 누드가 스캔달을 일으킨다.
    1924년 아내 에밀리와의 이혼 재판이 끝나자 11월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미드타운 아파트(35 East 58th St.)로 이사하고, 12월 11일 뉴저지 클리프사이드파크의 존 마린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이들은 렉싱턴 애브뉴의 셸턴(Shelton Hotel)으로 이사해 요리와 청소할 필요 없이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이 시절 뉴욕에 치솟는 고층 빌딩들이 영감을 주었다. 오키프는 "뉴욕에 비하면, 유럽의 시골은 보잘 것 없다"고 술회했다. 오키프는 아르데코 스타일의 라디에이터 빌딩(Radiator Building)' '달이 뜬 뉴욕 거리' '시티 나잇' 등 뉴욕의 야경을 비롯, 브루클린브리지와 맨해튼 빌딩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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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ia O'Keeffe, New York with Moon, 1925/ Radiator Building Night, 1927


    11년간의 호텔 생활 후 1936년 이들은 미드타운 펜트하우스(405 East 54th St.)로 이사했다. 그러나 강한 두 예술가들은 늘 충돌하며 살았다. 오키프는 늘 남쪽 뉴멕시코로 떠났고, 스티글리츠는 북쪽 레이크 조지로 갔다. 스티글리츠는 건강염려망상증으로 항상 의사 주변에 있어야 했다.  

    뉴욕 초기시절 오키프는 나뭇잎, 꽃, 바위 등 자연 소재를 단순화한 그림을 그렸다. 자질구레한 가지를 제거하고, 중요한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작업이었다. 오키프는 팬지, 나팔꽃, 칼라, 장미, 해바라기, 양귀비꽃, 호박꽃 등 현미경으로 확대한듯한 대형 꽃 그림을 200여점 이상 그렸다. 1925년 열린 오키프의 대형 꽃 전시에 대해 비평가들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앵글로 꽃을 성기와 자궁의 메타포로 분석했다. 2014년 소더비에서 꽃그림 'Jimson Weed'(1932)가 4천440만 달러에 팔리며 여성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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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fred Stieglitz, Georgia O’Keeffe, 1929

    오키프는 1927년 스티글리츠의 주선으로 브루클린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즈음 스티글리츠는 갤러리에서 자원봉사하던 젊은 여성 도로시 노만에게 한눈 팔기 시작한다. 오키프보다 18세 연하, 스티글리츠보다 41세 연하인 22세의 노만은 결혼해서 아기도 있는 몸이었다. 오키프는 그해 여름 뉴멕시코로 갔고, 스티글리츠는 그 틈을 타서 조수 노만의 누드를 촬영하며 사진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노만은 오키프가 뉴욕에 없을 때마다 스티글리츠 곁에 머물렀다고 한다.  

    1929년 오키프는 뉴 멕시코로 가서 타오스(Taos)에 머물렀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쓴 작가 D.H. 로렌스의 목장을 방문하고, 등산을 하며  동물 뼈다귀와 바위를 모으며 자연을 만끽했다. 이후 매년 뉴멕시코에 가서 작업하게 된다. 1933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바람끼로 인한 신경쇠약으로 2개월간 입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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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오키프는 산타 페에 완전히 정착해서 살았다. 1973년 고스트 랜치의 작업실에 27세의 청년 후안 해밀턴(Juan Hamilton)이 찾아왔다. 이혼한 도예가로 일자리를 얻기위해 문을 두드린 것이다. 85세의 오키프는 해밀턴을 채용했고, 이후 그는 전설적인 화가의 수족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78년 해밀턴은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이때 앤디 워홀과 조니 미첼이 찾아왔다. 

    오키프는 1986년 3월 6일 산타페에서 눈을 감았고, 7천만 달러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 해밀턴은 대부분을 오키프 유족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1943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오키프의 첫 회고전이 열렸으며, 3년 후 MoMA에선 첫 여성작가 회고전으로 기록된다.  


    612pBjci4JL.jpg Georgia O’Keeffe stamps, 1996

    1996년 미우정국에서 32센트 우표를 발행했으며, 이듬해 산타페에 오키프뮤지엄이 개관했다. 1991년 미 미술계의 파워커플 스티글리츠와 오키프의 삶을 다룬 TV 영화 'A Marriage: Georgia O'Keeffe and Alfred Stieglitz'가 제인 알렉산더와 크리스토퍼 플러머 주연으로 제작됐다. 2009년엔 케이블 채널 라이프타임에서 조안 알렌과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으로 오키프 전기영화가 만들어졌다.  


    000.jpg *'모던 패셔니스타' 조지아 오키프의 옷장@브루클린뮤지엄

    *Making Modern: 오키프, 하틀리, 도브, 마스덴, 쉴러@보스턴미술관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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