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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16.12.26 17:19

(236) 스테파니 S. 리: 지금은 사랑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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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22) 사랑과 슬픔의 표현법


지금은 사랑할 시간


1 couple.jpg Photo: Stephanie S. Lee


발의 노인 커플이 손을 잡고 건널목을 건넌다. 중심을 잡으려 어쩔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아니면 성질급한 할아버지가 보채며 할머니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두 노인이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풍경. 나에게 있어 이상적인 사랑이란 그런 모습이다. 세월을 함께 보내는 사이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남은 길을 가는 것.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여 손잡는 것이 단순한 육체의 결합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기에, 쉽지 않은 만큼 더 가치있는 사랑의 행위라고 간주한다.  


사랑의 표현법이 사람마다 다르듯, 사랑의 단계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성적매력에 끌려 자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시작했어도, 중년에는 서로 조정하고 노력하며 결실을 맺는 원숙함이, 노년에는 성별을 넘어 공감하고 교감하는, 서로를 향한 인류애 같은 것이 생겨나는게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엔 깊은 사랑의 확인이나 종족번식으로서의 성이 아닌 말초적 쾌락의 탐닉에만 집중된 비뚤어진 성행위들이 지나치게 쉬워졌고 중독적이 되버린 것 같다. 방금 저녁식사를 했는데 TV에서 맛있는 음식이 자꾸 나오면 이미 배가 부른데도 꼭 저걸 먹어야만할 것처럼 비정상적인 상태가 된다. 이렇듯 미디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과식과 탐욕을 부추긴다.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적 자극에 과도하게 노출되다 보니 성에 대한 인식 또한 비정상적으로 편중되어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 같다. 왠만한 수위의 자극은 이제 성에 차지도 않고 불법 동영상을 보는것도 ‘야동’이라는 별칭아래 누구나 봐도 되는 것쯤으로 가벼이 간주된지 오래인듯 하다. 방송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의 수준이 도를 지나쳐도 가벼운 농담 정도로 간주되고, 남자들은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세뇌시키기로 작정한듯 욕구를 조절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힘있고 능력좋은 사람이라는듯 아무렇지 않게 옹호한다. 


신체적 노화로 자연스럽게 성적욕구가 줄어들면 무슨 큰 죽을 병이라도 걸린처럼 굴고, 성관계를 주기적으로 하지 않는 커플들은 사랑이 없는 관계인양 비정상 취급을 하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사랑이 식은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마치 세상이 성욕으로 비롯되 성적 욕구의 최대충족으로 끝나야만 행복한 결론이라는듯 군다. 



3.jpg

Rose-Aimée Bélanger, Balançoire à deux, bronze, 14” x 11” x 9”



랑의 다양한 표현법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온 사회가 한가지 쾌락의 추구만이 행복의 필수 조건인듯 세뇌시키고 있는데, 백발이 된 두 노인이 열정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도 선택, 손잡고 산책하기로 한 것도 선택의 문제이지 손잡고 걷는 부부가 섹스를 메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따뜻한 포옹 안에 담겨있는 사랑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사랑에 비해 적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는 심각한 성범죄조차 별 것 아닌일쯤으로 관대하게 무마시키기 일쑤다.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면 성적 욕구를 때와 장소에 따라 자제할 줄 알아야 정상인것이며, 그런 규범을 지킬줄 알아야만 사회 안에서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약한지 뉴스를 통해 접할때 마다 어이가 없다.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공직자나 성직자들의 행태마저 예외없이 저급하니 제대로 된 성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것 같다. 길에서 똥오줌 싸면 창피한줄 아니까 아니까 배가 아파도 참으면서, 아무데서나 성추행 하는건 본능이라 어쩔수 없네 하며 부끄러운줄 모르면 그게 어디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인가 말이다. 


사실 사람은 섹스 없이도 아주 잘 살 수 있다. 섹스 안해도 안죽는다. 큰일 나지 않는다. 스님들이나 수녀님들만 해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정상적인 인간의 두뇌로 자제할 수 없는 본능이란 없으며, 반드시 성행위를 해야만 잘 사는것도 아니다.  그러니 사랑을 확인하고 쌓아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음을 알고,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엔 시국이 흉흉해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성향을 내 비추면 마녀사냥하기 바쁜것 같다. 다른사람의 불행을 공감해주고 다독여 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물론 꼭 필요한 일이며 좋은 일이다. 하지만 똑같은 슬픔을 겪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통곡하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 눈물을 참고, 또 다른 사람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얼른 잊고자 더 악착같이 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슬픔 앞에 열심히 일하는 건 저만 잘 살자 하는거고, 울지 않는건 냉혈한이고, 같이 집회에 참여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으면 다 매국노고 쓰레기라 하면서 우르르 비판하기 일쑤이니, 되려 자유와 민주주의를 앞세워 표현과 생각의 다양성을 말살시키고 있는건 아닌가 우려스럽다.  


사랑의 표현법이 다양하듯, 슬픔의 표현법이나 문제의 해결법 역시 한가지 일 수 없다. 그것이 어느쪽이든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 / 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