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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16.11.26 19:36

(229) 스테파니 S. 리: 현모양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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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21) 신부에게 하고 싶은 말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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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ff Muhs, Study in Form with Jimmy Choos and Concrete (left) / Black Corset(After Horst)


랜만에 결혼식엘 참석하니 감회가 새롭다. 또래 친구들이 이미 결혼과 출산의 시기를 지난터라 요즘엔 결혼소식보다 부고소식을 더 자주 듣게 되는데, 돌잔치나 장례식과는 달리 결혼식에는 왠지 모를 생동감과 흐뭇한 기운이 넘치는것 같아 다녀오면 늘 기분이 좋다. 어린 신랑 신부의 풋풋한 모습과, 갓 피어나는 그들의 사랑에 ‘그래, 사랑한다는 건 이런거였지’ 하며 그동안 말라붙어 존재마저 의심했던 사랑을 다시한번 믿어보자 희망하게 된다. 


하지만 ‘시집가서 김장 몇번만 하면 끝나고 마는 인생’ 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이듯, 걸어가는 신부의 뒷 모습이 못내 서글프기도하다. 지금이 가장 찬란할 때로구나… 이 아름답던 모습도 잠시, 이제부터 서서히 시들어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가정을 갖고 아이를 양육하는 여자들의 시간은 끝도없이 조각난다. 자기만 알고 살던 한 개인이 어쩔수 없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쓰던 시간들을 여기저기로 나눠 할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아이의 학교일로, 시댁식구 경조사로, 남편의 심부름으로 한조각 한조각 떼어주다보면 더이상 남은 시간이 없을것 같지만 누군가가 필요로 하면 여자들은 어떻게든 또 다른 조각을 찾아내서 떼어준다. 


비록 표면적이라 할 지언정 미국 남성들에게는 문을 잡아준다던지 자리를 양보한다던지 하는 여성을 배려하는 일상매너가 몸에 배어있다. 가사분담률도 월등히 높고, 성범죄나 이혼에 관련된 법도 한국보다는 훨씬 합리적이어서 이곳에 살고 있는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적이 많다. 하지만 여성의 인권이 다른나라보다 훨씬 더 보장된 이 곳에서도 한국 여성의 삶이란 여전히 힘든것 같다. 


남자들이 ‘힘들면 안하면 되지 않느냐’ 라며 간단히 결론 내려버리는 일들이 어쩐지 한국 여성들에겐 간단치가 않다. 무리하느라 심신이 망가지고, ‘피곤해 죽겠다’, ‘더는 못하겠다’ 하면서도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자가당착에 빠져사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발이 아파 죽겠으면서도 신고있는 구두를 벗어던질 생각을 못하게 하는게 이 몹쓸 현모양처라는 사회적 굴레 안에 갇힌 여성들의 자존심과 죄책감인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줌으로서 행복과 안도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한것 같다. 그런데 이런 행복의 추구는 태생적으로 상당한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댓가 없이 주는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면 족하지 않으냐고 말하긴 쉬우나 정작 자신을 버려가며 헌신했지만 상대가 알아주지 않을때 그것은 굉장한 배신감과 상처, 슬픔과 우울함으로 되돌아온다. 누구의 삶도 다른 누구의 희생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할 수는 없으며 어떤 삶도 타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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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ephanie S. Lee, Dream Chasing, Color and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장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전형적인 한국 시어머니의 이중잣대도 한몫 거든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같은 여성으로서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만큼, 나의 아이가 나에게 큰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나 내 자식이 태어난 이유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듯이, 내 자녀의 배우자는 내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깨달으셨으면 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며 당연한 것이다.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제도와 사회분위기는 잘못된 것이며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친 잘못된 사고방식도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여성들 스스로도 발이 아프면 구두를 벗어던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착한 여자, 완벽한 엄마, 헌신적인 며느리 따위의 타이틀에 얽매여 불행하기보다 비난받을 지언정 ‘내 삶을 당당하게 살겠다’ 하는 선택을 할 용기를 가져야 진정한 행복을 찾고,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동안 내 능력도 모르고 한참을 애썼던것 같다. 한정없이 잡아당기던 나의 끈은 어느 순간 결국 못견디고 끊어져버렸다. 사람이 다 잘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때는 의욕이 넘쳐 다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또 그래야만 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 애쓰지 말고 할수 있는 만큼만 할 것을, 나한테 좀 더 신경쓸것을, 하고 후회가 된다. 행복은 희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철없었고, 교만했고, 어리석었다. 


그래서 결혼을 통해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신부에게 나는 이제 현명한 아내가 되라고, 좋은 엄마가 되라고, 다 잘할수 있다고 말해주지않는다. 우선 자기 자신을 챙기라고, 무조건 본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라고, 그래야 남을 챙길 힘도 생기는거라고 말해준다. 비행안전 수칙에서도 비상시 산소 마스크는 본인부터 착용하라고 알려주지 않는가.


남자도 여자도 넓게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란 성별에 상관없이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소질을 개발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잊지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설령 본인의 재능과 소질이 가사일과 양육이 아니라고 해서 죄책감 갖지 말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도 말고, 불평하는 착한 여자가 되기보다 자유로운 한사람의 인간이 되기를…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 / 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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