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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16.01.10 14:45

(150) 스테파니 S. 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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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5) 사랑보다 더 믿는 것은 사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정치체제, 신앙, 형이상학 등의 주제는 공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적 신념의 문제이다. 실증적인 것들이 아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제를 꺼내는 것은 금기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예외다. 남자들은 사랑을 섹스로 환원시키고, 여자들은 그것을 애정으로 환원시킨다. 떠들어댄다. 무용담이 펼쳐진다. 사랑의 전문가들이다. 자신이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조잡한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랑 역시도 신념의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모르는 사람들.” – 조중걸, ‘러브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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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anie S. Lee, Sweet Nothings, 2013, Color &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17 ½˝ (H) x 17 ½˝ (W) x 2 ¾˝ (D) each



간색은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사람의 감각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색을 감지하는 추상세포의 분포와 민감도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빨간색을 보아도 각자의 뇌로 인식하는 빨간색은 다 다르다고 한다. 내가 본 빨강이 어떤 사람에게는 새빨갛고 어떤 사람에게는 덜 빨갛다는 거다. 놀랍지 않은가?


사랑. 이 단어를 이해하는 폭이야 말로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녀간의 사랑보다 인간 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지향한다. ‘사랑’보다 ‘사람’을 믿는다. 우리는 남성 여성이기 이전에 넓은 의미에서 모두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게 사랑이라고 동의한 감정은 매우 한시적이며 변수가 많은 반면, 이성성을 배재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간의 감정은 보다 예측 가능하고 꽤 오랜 시간 일정하게 유지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 사이의 관계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추상적이라 불안한 ‘사랑’에 반해 성행위는 구체적이고 측정가능한 것이기에 이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회자되며 점차 확대되고, 미화되고, 삐뚤어져 재생산된다.


그러나 나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면 몰라도 성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라는 것은 나와 상대간의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횟수로, 시간의 장단으로, 자극의 강약으로 측정되어서도 안되고 측정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본다. 사랑이 무언지 규정짓기는 모호한 상황이니 그런 통계와 수치로라도 사랑의 깊이를 구체화 하려는 억지같아 보인다. 그러나 소위 사랑해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 결코 그런 것들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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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anie S. Lee, Fruit, 2013, Color &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7 ½˝ (H) x 15 ½˝ (W) x 2 ¾˝ (D)



당한 주장일런지 몰라도 나는 남녀간의 사랑이 자녀를 낳기 전과 후에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아이를 낳은 남녀는 원하지 않으면 굳이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일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도 있다. 


번식이 끝났는데 왜 성행위를 지속해야 하는가? 매일 잠자리를 함께하는 부부는 유대관계가 좋고 성행위를 하지 않는 부부는 점점 멀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데,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방법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하는데 모두가 일정 횟수이상의 잠자리를 해야만 ‘정상적’인 관계로 간주된다는 말인가? 


사람도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남자는 원래 유전학적으로 번식을 많이 하기 위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무절제한 정욕을 부리는 일을 본성에 기대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은 사마귀를 보고 개미를 보라. 한낱 미물인 곤충과 동물도 일정 번식기간에만 교미를 한다. 교미가 끝나면 죽어버리기도 한다. 동물중 드물게 성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보노보 원숭이도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 줌으로서 서로 기분좋자고 하는 것이지 싫다는 상대에게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절제를 모르고 욕정에 탐닉하며 그것을 힘을 앞세워 지속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잔혹하게 인간세계에서 나타나는지는 전쟁이 일어났던 곳을 보면 알수 있다. 약자 앞에서 인간의 성욕이 얼마나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전시 상황에서 여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점령당한 식민지의 여인들과 소녀들은 어김없이 제일 먼저 성적으로 학대당하며 피해자들의 처참함은 차마 온전한 정신으로는 마주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남성우월주의가 심한 이슬람 국가들의 여성들과 소녀들도 모두 잘못된 성욕의 추구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시리아의 난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절박함과 열악한 환경을 빌미로 많은 시리아 여인들이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가해자들은 너무도 떳떳하고 뻔뻔하게 남성으로서 당연한 본능에 충실한 것이 그리 큰 죄가 되냐고 한다. 많은 성 범죄자들이 어차피 하는 경험 한번 더 하거나 조금 더 일찍 하는 게 그리 큰 문제냐며 공감능력이 말살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발언조차도 거리낌없이 한다. 



 심각한 점은 이제는 전쟁이나 큰 사회구조적 변화 없이도 그냥 인터넷에서 모여 재미로 이런 성적학대를 조직적이고 변태적으로 한다고 하니, 게다가 그런 범죄에 대해 처벌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니, 인간에게 성적 쾌락을 선물한 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사랑을 핑계로 한 자극적이고 왜곡된 성행위의 허상들이 너무도 많이 우리 모두에게 노출되어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이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인식하는 빨강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이것은 빨갛다’ 라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뇌에 보정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정도 발달된 뇌를 가졌는데 우리는 어째서 유독 성에 대해서만 아직 이렇게 원시적이고, 관대하고, 허술한지 모르겠다. 적어도 인간은 벌레보다는 고등한 자제력과 지능, 사회규범이란것을 갖고있지 않은가. 초록불엔 가고 빨간불엔 멈추는 것이 지켜져야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모두가 교통질서를 당연히 지키며 살아가듯이, 성에 관한 문제도 당연히 지켜져야 할 규범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금욕을 권장하거나, 성행위에서 오는 쾌락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건전하고 합법적이라면 자유롭게 쾌락을 추구할 권리는 있다. 문제는 그것이 상대의 동의없이 행해지며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힐 때 생긴다. 쾌락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법에는 술, 도박, 흡연, 게임 등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얻어진 쾌락에는 대게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공통적으로 상대방 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강을 잃는다던지, 돈을 잃는다던지 하며 자신들 역시 어느 정도의 폐해를 입는다. 그런데 이 성폭력이라는 것은 고약스럽게도 가해자에게는 이렇다할 손해를 끼치지 않는 반면 피해자에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도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성에 관한한 윤리규범이 보다 절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성행위로 얻는 쾌락은 어떤 다른 쾌락의 추구보다 더 철저한 도덕적 잣대 안에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사랑,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는 명확히 규정짓긴 어렵지만 그것이 성을 앞세운 폭력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싫다는 사람에게 사랑을 핑계로 성적 학대를 가하는 행위는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는 엄연히 범죄다. 사회 안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것에 강한 신념을 담아 동의해야 한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 / 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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