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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11.22 10:56

(135) 한혜진: 고추잠자리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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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 (20) 꿈쟁이를 위하여



고추잠자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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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하늘이 시가 되고,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한폭의 풍경화가 되는 걸 보니 벌써 가을인가 봅니다.  이제껏 걷고 있던 사람이라도, 이런 날씨엔 잠시 쉬고 싶어집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마침 걸터앉을 벤치라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내 주위를 둘러싼 자연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준비하듯, 조용히 다소곳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을은 이야기에 이끌리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 햇살아래서 또박또박 책장 넘기는 일이 어울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요즈음, 저의 손에 잡힌 한 권의 책은 한국의 창작동화 100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동화책에 묻혀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일까요?  그 솜사탕같은 세계에서 발을 쑥 빼버리게 되는 건… 어른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는 사춘기인 지도 모르죠.  그만 시시해져 버리는거죠.  따르릉하고 걸려오는 전화기를 알고 부터는 플라스틱 장난감 전화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게되는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른의 세계가 어디 그리 만만합니까?  종종 자신의 통제권을 웃도는 세계에서 휘둘리다보면, 그 옛날옛날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읽는 동화책이 저에게는 묘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책을 마다하고 그 책을 잡았으니까요.  짧은 동화 몇 편을 주루루 읽었습니다.  그런데, 박성배 작가의 ‘고추잠자리 꿈쟁이의 흔적’이 마음에 와 닿더군요.  저를 지나버린 철부지 소녀 시절로 데리고 갔으니까요.  



2011-3-1.jpg *'고추잠자리 꿈쟁이의 흔적' 스토리



자리채.  지금은 사라진 풍물의 하나일테지요.  대나무에 고깔 모양의 망이 달려 있어서 하늘 높이 쳐들고 뛰어다니다 보면, 공중에 빙빙 날아다니던 잠자리가 걸려들기 십상으로 만들어진 개구장이들의 소품이었지요.  그 시절, 시내 변두리  지역에 살았던 저는 여름방학 숙제에 꼭 끼어있던 곤충채집이라는 커다란 과제물때문이라도 남자 아이들 틈에 끼어서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때는 순진하게 낮은 꽃잎에 살포시 내려 앉는 잠자리를 손으로 잡기도 했지요. 네 개의 긴 날개 중 하나만이라도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울 수 있으면 포로로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지요.  파르르 떨며 꽁지를 우산 손잡이처럼 말아 올리던 고추잠자리의 추억이 생생해집니다.  


동화 속의 고추잠자리, 꿈쟁이는 욕심이 많은 놈이지요.  욕심이 많다보니 고민도 많지요.  단풍나무 가지에게 와서 대화를 나누곤 하지요.  자기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어느 날,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뛰어듭니다.  글을 배울 요량이었지만, 아이들 손아귀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지요. 또 한번은 달까지 갔다오는 여행을 하겠다며 고공행진을 계속하다가 숨이 막혀 그대로 돌아옵니다.  단풍나무는 안스런 눈으로 꿈쟁이를 지켜 봅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꿈쟁이는 단풍나무 가지를 찾아 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나같은 미물까지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면 세상은 너무 복잡할 거예요.”   안녕 인사를 고하고, 날아오르는 순간 남쪽으로 여행길을 떠나던 제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잠자리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듬해, 꿈쟁이가 앉아서 얘기하던 가지 끝에 빨간 단풍잎 하나가 돋아 납니다. 단풍나무는 그걸 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꿈쟁이 고추잠자리를 추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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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 뉴욕에서도 여름은 갔습니다.  여름도 이야기 속의 고추잠자리처럼 욕망하고, 꿈꾸고, 왕성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바닷물은 모래사장에 새겨진 수많은 피서객들의 발자국을 지울 것이며, 바다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계절이 올지라도 이를 탓하지 않을 겁니다.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를 입에 물고,가지끝에 달린  단감이 그려내는 풍성한 가을의 그림을 한창 즐기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뜨겁던 햇살과 고마웠던 빗줄기의 흔적을 잠시나마 떠올리곤합니다.  우리 입 속에 단물로 남은 그 흔적을….이 순간, 나의 흔적 따위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모든 생명의 공통된 운명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 때까지 꿈꾸며 사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 할 일입니다.  고추잠자리의 흔적, 저에게는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저는 이제 동화책의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쳐다봅니다.  


고추잠자리여 안녕, 여름이여 안녕.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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