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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11.13 12:05

(132) 한혜진: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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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 (19) 그녀의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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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새, 가을이 깊어졌다.  뉴욕의 가을은 이렇게 빠르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분주하게 보내고, 서머타임이 해제가 되고나면, 가을은 군데군데 짙은 색으로 덧칠해진 유화처럼 두터워져 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빛깔의 세상을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마치, 클로징 세일을 하고 있는 가게 안의 물건들이 마감일을 앞두고 점차 줄어들듯이, 정리작업에 들어간 나무들도 점차 가벼워지는 모습이다.  일할 수 없는 날이 다가온 빈 공간의 가게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목이 된 나무들이 긴 휴식시간에 들어서는 날이 가까이 오면, 우리도 괜시리 인생의 덧없음같은 상념의 끄트머리를 차 한잔에 넣어마시며, 계절과 인생과 추억을 음미해 보는 것이리라.

이런 가을날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는 좋은 것이다.  초대 속에는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에 대한 응대가 이루어질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지만, 얕은 물줄기가 생겨나 작은 물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살아가면서 많은 아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내가 지나치는 곳, 기웃거리는 곳을 통해서.  때로는 그 중에서 각별히 초대하고픈 사람이 있다.  그냥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느낌, 그래서 가끔 초대가 이루어진다.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일게다. 선물이 우리의 마음을 물질로 표현한 것이라면, 초대란 마음의 발로를 행동으로 옮기는 첫인사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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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양옆으로 단풍일색이었다.  롱아일랜드의 스미스타운으로 이끄는 노던파크웨이는 약식이지만, 단풍구경길 바로 그것이었다.  만끽하는 기분이란 부족한 것보다는 언제나 기분좋은 것이다.  운전하는 내내 오색의 물감이 나에게 번져와 나는 자연히 가을 여자가 돼가고 있었다.  집은 주인을 닮아 있다.  자기를 닮은 집을 고르기 때문일까?  집 뒤로 개울이 흐르는 그녀의 집에 당도한 것은 집을 나선지 30분이 지나서였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집에 들어설 때, 기꺼이 오늘 대접하고자 자청한 그녀의 얼굴이 세월이 지났어도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타고난 미모에다, 마음까지 예쁘니 나이가 파고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아이들이 어릴 적에 학부형으로 만나 서로 학교일을 돕고 하던 차에 개인적으로도 친해진 사이였다.  서로 옛 동네를 떠나 살게되자 한동안 격조했었지만, 아이들이 많이 커버린 지금 우연히 만나게 되니, 다시 이민 초기 때의 생각이 나면서 옛정이 새로워진 사이가 돼버린거다.  아는 사이를 거쳐 친한 사이가 되고 , 허물도 장점으로 보게되니, 짐짓 서로가 외로워지기 쉬운 앞으로의 생활에 마음의 벗으로 여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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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으로 버무릴 줄 아는 그녀의 음식 솜씨는 감칠 맛으로 입속에서 녹아내렸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개운하게 소화를 돕고 있었다.  초대란 어쩌면,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누군가의 세계에 들어가 나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의 약하고 부끄러운 점을 알게 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융화되는 과정에서 기쁨이 생기기도 한다.  잘 대접을 받고난 후의 느낌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나 자신도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살이란 사람들의 초대를 받고, 나 또한 누군가를 초대하여 그 속에서 주고 받는, 사랑과 우정과 즐거움과 감사라는 숭고한 교감이 어우러져서 이어가는 시간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갖게 된다. 

“즐거웠어요.”  아쉬운 시간을 뒤로 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낙엽이 지는 가을날, 바람이 불면 더욱 스산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영화 ‘AMERICAN BEAUTY’의 감독이 휘날리는 휴지 조각에서 아름다움을 간파했듯이, 나 또한 떨어지는 낙엽들이 축복의 색종이인 양, 작은 생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이 멋진 세상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초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은 황량하기만 하고 서글프게 느낄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다.  초대받은 파티에서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듯이, 이 세상에 초대된 나라면 최선을 다해야 함을 알게 된다.  초대의 시간이란 길지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이 멋진 초대에서 물러가야 할 무렵, 나는 무슨 말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낙엽이 뒹구는 아스팔트 위에서, 힘껏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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