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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임/창가의 선인장
2015.09.06 22:29

(115) 이수임: 우리도 불륜 커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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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선인장 (22) 경포대 연가



우리도 불륜 커플처럼



22 Menu for an affair.jpg 

Soo Im Lee, red gossip, 2012, gouache on panel, 12 x 12 inches



편의 머리는 반백에 배도 약간 나왔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만난 친구 왈 ‘네 남편 얼굴이 작아진 것 같다.’


나. 나는 작고 마른 것이 요즘 잘 걷어 먹고 자란 초등학생 몸매나 될까? 후덥지근한 날씨를 핑계로 나이답지 않게 소매없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 게다가 빨간 테 선글라스에 챙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래서였을까?


더위와 사람에 지쳐, 강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해 쪽으로 제일 먼저 떠나는 버스가 강릉이라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올라탔다. 귀가 먹먹하더니 안개쌓인 산길 사이로 잘 뚫어 놓은 터널을 지나갔다. 문득, 예전에 산을 굽이굽이 돌아 만들어 놓은 길은 지금도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강릉에 내려 경포대 가는 택시를 탔다. ‘현지 주민의 바램과는 달리 터널이 잘 뚫리자 관광객들이 당일치기로 왔다 가기 때문에 숙박 영업경기가 좋지 않다.’는 운전사의 넋두리를 들으며 데려다 준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호텔에서 소개해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당 입구 커다란 어항 속,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건지 헤엄치는 건지 모를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갇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늘이 벗겨지고 지느러미가 거덜거덜한 모양새가 차라리 ‘죽여주쇼.’ 하는 표정이다. 식욕이 사라졌다. 갑자기 쌍까풀을 심하게 한 아줌마가 호텔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반기며 튀어나왔다.


메뉴를 보는 남편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입맛을 다시며 소주를 주문해야 하는 시점인데 말 없이 메뉴판만 보고 있으니...

“왜 그래, 먹을 게 없어요.” 나에게 슬그머니 건네준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메뉴판 가격에 동그라미가 너무 많았다. 15만원, 25만원 비싼 것은 35만원이었다. 한 접시에 100~300불이라니! 식당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다. 별볼 일 없이 생긴 식당 주제에.


쌍까풀 아줌마가 잘해 드릴테니 주문하라고 재촉했다. “죄송한데요. 왜 이리 동그라미가 많아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얼굴을 식탁에 파묻고 아무 말이 없다. “동그라미가 많다니요?” “죄송한데요. 우린 돈이 없어서 안 되겠는데요. 일어서려는 나에게 잘해 주겠다며 붙잡았다.


뿌리치고 나오는 내 뒤를 남편이 안절부절 따라 나오며 말했다.

 “혹시 우리를 불륜으로 보고 불륜메뉴를 보여 준 것 아니야?” 

“설마?” 

불륜들은 저 메뉴판 보고 상대방 체면 때문에 차마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얄팍한 상술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느적거리는 대낮엔 길거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가, 저녁 무렵엔 불야성처럼 가게들 문이 열리고 길거리엔 사람이 넘쳐났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다음 날 아침에 찻집을 찾지 않았을 텐데.


모닝커피 마실 찻집을 찾으며 경포대 바닷가를 걸었다. 바닷가 후미진 곳, 파운데이션을 바삐 발라 허옇게 뜬 얼굴에 진분홍 립스틱을 짙게 바른 아줌마가 손수레에서 커피를 팔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을 시켰다. 립스틱 아줌마는 커피를 타 주면서 힐긋힐긋 우리를 쳐다봤다.


‘밤새 여행객들이 다 떠난 빈 아침 바닷가, 반백이 된 남자와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거닌다는 것은 그렇고 그런 사이다.’라는 표정인가? 아니면 어젯밤 불륜메뉴에 놀라 지레짐작으로 오해하는 건 아닌지? 


우리는 마치 불륜 커플인양 기분을 내며 아침 바닷가를 거닐었다. 1,000원짜리 커피 맛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Soo Im Lee's Poto100.jpg 이수임/화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학사, 석사를 받았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대에서 판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대학 동기동창인 화가 이일(IL LEE)씨와 결혼, 두 아들을 낳고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서 작업하다 최근 맨해튼으로 이주했다. 2008년부터 뉴욕중앙일보에 칼럼을 기고해왔다. http://sooimlee3.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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