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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04.11 22:04

(92) 한혜진: 세상을 깨어나게 하는 '봄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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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 (15) 봄 신드롬 



세상을 깨어나게 하는 '봄의 키스'



아, 다시 봄이다.
오늘 아침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싶어진다.  
일어나 방에서 나오다말고, 심호흡과 함께 몸을 길게 뻗어 스트레칭을 해본다. 
팔을 위로 뻗치고 좌우로 몇번 움직여 주다가 몸을 푸니 눈물이 찔끔 나온다.  
웬 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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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벙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니, 세상은 채 마르지않은 수채화처럼 약간은 젖어 있다.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용트림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말라서 부러질 것같은 나무가지 끝에까지, 뿌리 속에 고여있던 수액을 한껏 빨아올린 것이리라.  아, 다시 봄이구나. 봄이 오고 있구나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직도 잔설을 드문드문 깔아놓은 잔디밭은 겨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지만, 하루하루 봄이란 계절은 겨울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 속에 들어 앉은 봄은 마치 아물기 시작하는 생채기가 그런 것처럼 매우 가려워진다.  ‘어느새, 가을이던가’ 하면서 음미하던 지난 가을은 묵직한 계절 겨울에 묻혀버리니, 우리는 담담하게 겨울과 맞서지 않았던가? 

연말연시라는 북적거림 속에, 겨울의 한 바탕을 통과하고나서, 세찬 겨울 바람 속에 몇번이나 몸을 움추린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이면, 마른 뱀껍질같은 종아리 살갗은 왜 그렇게 사람을 궁시렁거리게 하는 건지. 이상이 말한 날개가 돋으려는 듯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던 증상도 어쩌면 봄의 징후를 몸으로 느낀게 아니었던가 상상해본다. 

에는 ‘다시’라는 말이 어울린다.  세상이 다시 아름다운 제 모습을 찾으려는 채비, 그것이 봄이 아닐까?  ‘봄 봄’하고 몇번 되뇌어 본다.  양 입슬 사이에서 튕겨져나오는 그 말은 작고 수많은 비눗방울이 되어 공기 중에 퍼진다.  봄은 무거움을 떨쳐내는 가벼움이다.  혼곤함 속에서 나타나는 뚜렷함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찾아온 왕자님의 입맞춤이다. 봄의 키스는 세상을 깨어나게 한다.  세상 만물 속에 쉬고 있던 삶의 기운이 일어나 춤추는 계절, 그래서, SPRING이라고 말하여지는 것일게다.  

봄은 우리로 하여금 둘러보게 한다.  하늘 끝에서 번져오는 따스한 온기에 거침없이 벗은 몸을 맡기는 나무처럼, 그렇게 봄을 느끼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옷을 짓는 디자이너처럼, 봄은 나무들에게 바지런히 황홀한 옷을 만들어 입히고 나들이에 나서게 한다.  그들의 행차를 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즐거워지지 않는가?  세상 꽃들도 일제히 만개해 그들의 파트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목청껏 노래부르는 새들도 기꺼이 들러리가 되어 동참하는 광경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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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아침, 나에게 다가온 봄의 기운은 나로 하여금 봄의 파노라마를 펼치게 한다.  나는 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세월 속에서 학습한 봄을 물끄러미 떠올리며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매년 봄의 강의는 같지 않았음을 상기해본다.  그러니까 봄은 또 다시 기다려지는 것일게다.  
딸아이에게 자주 걸려오는 남자친구의 전화에 귀가 솔깃해지던 날, 미니스커트 밑에 맨살을 드러낸 딸아이의 친구에게서 느껴보던 풋풋함, 아들아이가 입은, 미처 채우지못한 하얀 와이셔츠 커프스의 빳빳함이 유난히 싱그럽게 전해져 오던 날, 나는 봄을 기억하곤 했었다.  언젠가 내가 하고 있었던 그 모습을 다시 내게 보여주는 그들에게서 봄을 느꼈었다.  
EVERYTHING IS COPY’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번 봄은 지난 봄의 복사본이요, 내 아이들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슬라이드를 그대로 재연할 뿐이란 말인가?  봄은 CIRCLE OF LIFE를 생각나게 한다.  그 속에 내가 채워넣었던 몇 컷의 필름을 떠오르게 한다.  

아, 다시 봄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름다운 봄날을…  다시 봄으로 피어날 순 없지만, 그래서 난 봄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하루하루 내 곁에서 봄은 툭툭 터져날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내 가슴은 겨울보다 더 시릴 것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밭에다 대고  ‘어쩌자고, 어쩌자고’를 외쳐댄 시인의 마음이 되어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감히 누가 봄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찬란함에 눈 멀게 되더라도.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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