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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
2015.02.09 10:09

(79) 이영주: 뉴욕에서 본 '국제 시장'

조회 수 4466 댓글 1
뉴욕 촌뜨기의 일기 (18)


뉴욕서 본 영화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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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국제시장’을 봤습니다. 제가 몬태나에 있는 딸집에 가던 주말에 영화가 개봉되었고, 거기서 2주일 동안 있다가 온데다, 오자마자 딸들이 연주 여행가는 바람에 블루네 집에서 거의 일주일을 또 보냈기 때문에 극장서 ‘국제시장’ 보기는 틀렸다고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영화가 상영 중이라는 겁니다. 급히 연통했더니 웬만한 친구들을 다 영화를 봤고, 저와 에스더만 못 봤습니다. 에스더는 호리카 멤버의 막내입니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든 공연을 보든, 보기 전에 저녁을 함께 먹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저보다 맛집을 잘 아는 에스더는 제게 1. 인도 음식, 2. 중국집(soup dumplings), 3. 소람(한국음식), 4. 이탈리안(특히 피자와 홍합탕 잘함) 중 한 곳을 고르라며 옵션을 보내왔습니다. 홍합을 좋아하는 저는 홍합탕 잘한다는 집을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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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Gina H. Yelp                                                                            Photo: William L. Yelp


피자와 홍합탕, 티라미수가 끝내준다는 그 집은 제가 살고 있는 클립사이드 파크의 바로 아랫 동네인 노스버겐의 이탈리안 식당 트라토리아 라 소렌티나(TRATTORIA LA SORRENTINA)이었습니다.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는 걸 보니 맛있긴 맛있는 집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시간에 오면 줄을 서는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징어 튀김과 홍합과 조개탕(홍합탕에 조개를 섞은 게 아주 맛있었습니다), 마그리타 피자를 주문했습니다. 처음 나온 오징어 튀김은 완전 예술이었습니다. 파슬리가 섞인 튀김옷을 입은 오징어 튀김은 아주 알맞게 잘 튀겨져서 입에 넣으면 바삭하면서도 쫄깃한 오징어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토마토 소스로 만든 홍합 조개탕도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딱 우리 한국인의 입맛이었습니다. 뉴욕서 젤 유명한 피자집 중의 하나가 블루네 바로 옆집에 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집 피자는 훨씬 더 맛있고, 가격도 착했습니다.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이렇게 맛있는 피자집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저는 뉴저지에 사니까 다른 나라 음식은 의례 맨하튼이 더 맛있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음식은 남았고, 너무 포식을 했지만, 그래도 이 집의 티라미수는 안 먹으면 안된다는 에스더 조언에 하나만 주문해서 둘이서 카푸치노와 함께 맛을 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제가 만든 티라미수가 더 맛있습니다. 하하. 저는 티라미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암튼 매우 만족스럽고 푸짐한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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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영화관은 바로 저희 옆동네인 에지워터에 있습니다. 에지워터에 복합관인 이 영화관이 생겼을 때 제 소원이 언젠가 이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넓은 주차장과 앞에는 ‘시티 플레이스’라는 쇼핑 상가가 자리하고 있는 이 극장은 허드슨 강가라서 영화 보기 전이나 후에 강변을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도 있습니다. 전에는 루트 46에 있는 극장에서 가끔 한국영화를 상영했는데, 그 곳은 가기도 편치 않고 너무 외져서 밤에 가기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 극장이 재단장하느라고 문을 닫은 후부터 에지워터의 극장에서 한국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해서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작년에 ‘명량’이 상영될 때도 친구들과 뿌듯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1천 3백만 관객이 넘어 역대 흥행 수위 2위가 되었다는 화제의 영화답게 ‘국제시장’은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볼거리라기 보다 제게는 제 일생의 흔적을 뒤돌아보는 것 같은 역사적 느낌이 더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흥남 철수 작전은 몰랐지만 1.4 후퇴로 서울서 피난 가던 길, 어린 제가 한강을 건너던 밤의 깜깜한 강물을 밝히던 함초롬한 달빛, 밤하늘을 수놓은 반짝이는 별들, 실루엣으로 보이던 나무들의 풍경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 생각했던 느낌이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영롱합니다. 신기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궤멸 상태가 되었는데, 북한이 원산부터 육로를 차단해서 흥남 철수작전(1950.12.15.~12.24)이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과 민간인 2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대대적인 해상 철수 작전이었습니다. 철수 마지막 배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출항 시간을 11시간이나 늦춰가며 화물칸까지 태워도 2천명 밖에 타지 못하는 배에 피난민 1만 4천 명을 태웠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거제도에 무사히 전원 도착해서 사람들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답니다. 떠날 때는 1만 4천명이던 것이 도착했을 땐 1만 4천 5명이 되어 5명이 더 늘었는데, 그것은 아기 5명이 배 위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미군들은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아기들에게 ‘김치 1, 김치 2, 3, 4, 5’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중 ‘김치 5’였던 아기가 현재 거제도에서 수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필씨란 후일담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빅토리호를 기리기 위해 거제도에 ‘흥남철수작전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흥남철수작전의 영웅은 당시 철수작전 사령관에게 흥남 시민들을 같이 데려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성사시킨 현봉학 박사입니다. 제가 가톨릭으로 영세 받을 때 제 대부님이 현봉학 박사였습니다. 그 분은 원래 많은 사람들의 대부를 서시기 때문에 저를 기억도 못하십니다만, 그 분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했던 분인 줄은 저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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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아우르는 영화는 당시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함축된 역사 적 배경 속에서 산업화 시대에 고생한 아버지의 얘기입니다. 어찌 아버지 뿐이겠습니까. 우리도 6.25 이후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미군 찝차가 지나가면 “기브 미 초콜렛!” 하며 쫓아가던 세대입니다. 대학 때 시를 쓰던 선배는 최초의 월남 참전 시인이 되어 유명세를 얻어 그 후 문학계에서 승승장구 했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은 6차례에 걸쳐 연인원 32만 명의 장병을 월남에 파병했습니다. 처음엔 의무관과 태권도 교관 등 비전투요원을 보냈고, 2차 때도 2천명의 비전투요원인 비둘기 부대를 파병했지만 3차 때부터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 전투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 인기가수 남진이 가수로서 전성기에 월남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파독광부는 1963년부터 80년까지 8천 명, 간호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 명이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의 한국은 실업률이 40%였고, 경제도 암담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이 독일서 벌어 송금하는 돈이 당시 국민 총생산 GNP의 2%였다고 하니 오늘날 한국의 경제 근간이 이들 파독 인력수출로 마련된 것입니다. 서울서 자란 저는 광산의 실태를 알지 못합니다. 영화에서 입 안에까지도 새까만 석탄이 들어 있고, 샤워를 하면 새까만 석탄 국물이 나오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 광부와 간호사가 이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나눴을 외로움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들 중 수 백 쌍이 결혼했고, 계약 후 독일서 공부해 박사 학위를 딴 사람도 5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와 노력은 쉽게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도 심심찮게 파독광부와 파독 간호사 커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로맨스가 이토록 가슴 시린 로맨스일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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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쏙 빼게 만든 주인공 덕수와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렸던 여동생 막순이의 상봉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1981년에 미국에 왔고, 처음 미국에 와서는 한국 신문 구독도 없이 몇 년을 살았으니 제가 미국 온 다음의 몇 년간 한국 소식은 감감절벽입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453시간 35분 동안 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78%의 놀라운 시청률 속에 방영된 이산가족 찾기는 10만 건이 접수됐고, 그중 1만 189명이 상봉했으며 아직 남은 이산가족은 6만9천 명이라고 합니다.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 광장을 채운 인산인해에 보기만 해도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한국의 최근 세사 중 한 페이지를 가감없이 묘사합니다. 아버지를 잃고 소년 가장이 되어 생존 자체가 버거웠던 시대를 서막으로 파독광부에서, 월남 참전용사로 수난 시대를 거쳐 국제시장 ‘꽃순이네’ 가게서 전성기에 이른 덕수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기만 합니다. 그의 치열했던 삶이 바로 우리들의 과거와 합일점에 있기에 사람들은 공감하며 울고 웃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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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젊은이들은 이런 부모들의 희생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는 일은 고달프고, 누구나 다 고뇌하고 갈등하며 폭풍우를 견뎌내긴 하지만,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의 아픔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고통입니다. 우리 세대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삶과 투쟁해왔고, 거시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까지 치열했습니다. 독일의 광산에서 석탄 때를 내 몸의 일부로 두르고, 독일 병원에서 간호사들은 시체를 씻기며, 월남 전쟁터에선 내 목숨까지 담보로 조국을 위해 베트콩과 싸우면서 자기를 희생해왔습니다. 이타( €利他)적인 희생입니다. 이기적이기만한 젊은이들의 희생이 이타적이지만 못하다는 식의 잣대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세대의 이타적 희생은 시대적 소명이었음을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다 올라가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참 좋은 시대,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뉴욕서 한국 영화를 메이저 영화관에서 보게 되다니. 그리고 전에는 한국 영화를 상영해도 극장에 가보면 다섯 사람도 안 될 때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젠 개봉한지 3주가 지났는데도 관객이 꽤 되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인도 영화를 보러 왔다가 인도 사람으로 꽉 찬 모습에 부러워했던 일이 새삼 기억납니다. 이젠 우리 뉴욕에 사는 동포들도 한국 영화를 기다리고 한국 영화 상영할 때마다 점점 더 많이 관심을 갖습니다. 조국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일 것입니다. 맛있는 저녁과 감동적인 내 조국의 영화, 오늘도 멋진 추억의 하루가 되었습니다.


이영주000new100.jpg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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