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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희/수다만리
2014.06.19 22:23

(24) 박숙희: 이런 사랑 이야기, 로리와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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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2) 그녀의 삶을 바꾼 이 한편의 영화



실낙원의 연인들:
뉴욕의 건축가 로리와 아칸소의 사형수 데미안


“벌거벗은 도시엔  800만가지의 스토리가 있다. 이건 그 중의 하나였다
(There are eight million stories in the naked city. This has been one of them.).”


6a012876c6c7fb970c017c33586ab3970b-320wi.jpg 로리 데이비스와 데미안 이콜스


뉴욕을 배경으로 한 흑백 필름 누아르 ‘벌거벗은 도시(The Naked City)’는 영화 자체보다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해설이 더 유명하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서로 스쳐 지나간다. 옷깃만 닿아도 인연이요, 우연이 필연이 되고 운명이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섹스 앤더 시티’의 캐리, 미란다, 사만다, 샬롯은 섹스와 마놀로 블라닉 구두에 집착하는 뉴욕의 싱글녀들이지만, 뉴욕에는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싱글녀도 있다. 

브루클린 파크슬로프에 살던 건축가 로리 데이비스(Lorri Davis)는 그런 여인이다. 
그녀가 운명의 사랑 데미안 이콜스(Damien Echols)를 발견한 것은 1996년 3월 MoMA의 영화관에서였다. 게다가 데미안은 사형수로 저 멀리 아칸소의 감옥 안에 있었다. 

데미안은 로리의 인생을 바꾼 다큐멘터리 ‘실낙원: 로빈훗힐의 아동 살인자들( Paradise Lost: The Child Murders at Robin Hood Hills)'에 나온 주인공. 로리는 영화 속의 사형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데미안은 그녀보다 11살 아래였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이 한편의 영화


Paradise_Lost_Dvd.jpg 다큐멘터리 '실낙원...'은 3부까지 제작됐다.


MoMA와 링컨센터의 신인감독 영화제 ‘뉴 디렉터스 뉴 필름스’에서 상영된 '실낙원...'은 1993년 아칸소주 웨스트멤피스에서 8세의 어린이 3명을 폭행살해한 죄로 수감된 3명의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빌 클린턴이 주지사를 지냈던 남부의 자그마한 아칸소주. 독실한 기독교 타운인 웨스트멤피스에선 세 소년 살인사건이 '사탄의 제의'라고 믿고 있었다. 혐의자로 지목된 세 청소년들은 헤비메탈을 즐기며, 검은 옷을 즐겨입는 ‘문제아’들로 보였음이 분명하다. 

경찰의 강요로 혐의자 중 하나이자 정신박약아인 미스켈리가 자백을 했다. 그리고, 세 청소년들은 유죄로 판결된다. 미스켈리(18)와 볼드윈(16)은 종신형, 불량배 우두머리 데미안 이콜스(19)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중 이들은 '웨스트 멤피스 쓰리(West Memphis Three)'로 불리웠다.  '실낙원'은 이 재판의 진실성을 파헤치는 3부작 다큐멘터리다. 



West_Memphis_Three_Mugshot.jpg 
 1993년 멤피스 쓰리의 머그. 왼쪽이 데미안 이콜스(19).


로리는 머리가 긴 데미안을 본 순간 소녀로 착각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로리는 자신이 웨스트버지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소녀시절을 떠올렸다. 조그만 마을에선 작은 일도 크게 비화되고, 동네 사람들의 여론도 가혹할 수 있다. 뉴욕같은 다민족의 용광로에선 관용이 앞서지만, 작은 마을에선 편협이 팽배할 수 있다. 헤비메탈에 심취한 세 청소년들은 물질적 증거없이 살인자로 몰렸다. 경찰이 강요한 자백으로 세 청춘은 세상과 격리된 채 철창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로리는 데미안에게서 무-엇-을-보-았-을-까-?


‘실낙원…’에서 데미안을 만난 로리 데이비스는 당시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에 살며 맨해튼의 조경건축가로 일하고 있었다. 로리는 이혼 후 요가와 영화, 갤러리 방문을 즐기는 서른세살의 '돌싱'이었다.

영화 속에서 데미안을 본 후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그녀는 데미안이 억울하게 갖혀 있다고 믿었으며,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했다. 사형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편지였다.  


영화를 본 지 일주일 후 로리는 펜을 들었다. 
“영화를 봤어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일주일쯤 후 답장이 왔다. 
“이 상황의 처음부터 저는 이 모든 것에도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로리는 사형수가 남부의 신사처럼 쓴 것에 감동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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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가정에서 태어난 데미안에게 건축가 로리는 머나먼 세계의 여인이었다. 대학생은 '달을 걷는 것'처럼 그의 세계에선 아득한 일이었다. 로리가 사는 뉴욕은 TV에서나 볼 수 있는 도시일 뿐.

서른세살 건축가와 스물두살 사형수 간의 롱디스턴스 연애는 편지로 무르익어갔다. 감옥 안에서 철학책을 탐독한 데미안은 그림으로 사랑을 전했다. 

수많은 편지를 교환한 지 몇 개월 후 ‘LOVE’라는 단어도 쓰게 됐다. 데미안의 편지가 오면, 로리는 봉투를 열어 코를 부볐다. 편지에선 정향(clove) 내음이 났다. 데미안도 로리의 편지가 오면 냄새를 찾았다. 로리의 내음은 해처럼, 꿀처럼 따뜻했다. 


마침내 1998년 로리는 데미안의 곁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뉴욕을 떠나 아칸소의 리틀록으로 이주한 것. 
빅토리안 양식의 오래된 집을 빌렸고, 공원국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월급은 뉴욕의 1/4에 불과했지만, 집에서 데미안이 있는 감옥까지는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1시부터 4시 사이엔 데미안을 면회갈 수 있으니 행복했다. 


deathrow9.jpg 결혼식 피로연에서 로리.


정신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워졌지만, 육체적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결혼이었다. 사형수와의 결혼은 면회 때 접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999년 12월 로리와 데미안은 면회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두 사람은 처음으로 유리벽을 사이에 두지 않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피로연에는 데미안 대신 그의 사진이 등장했다. 

이들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날, 결혼식날 로리와 데미안은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 6년간 감옥 속에서 데미안이 육체적으로 접촉한 때는 죄수들로부터 매맞을 때뿐이었다. 데미안의 몸은 떨렸고, 땀이 흘렀다. 비록, 결혼식날 밤 홀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로리는 행복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데미안과 로리


결혼 후 로리는 무고한 데미안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정식 아내로서 변호사도 선임하고, 기금도 마련했다. 무죄를 입증하는데는 DNA 증거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록그룹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가 자신의 변호사를 대주고,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 영화배우 조니 뎁, 가수 패티 스미스,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감독도 몇 년간 변호비용을 대주었다.


Paradise_Lost_2_DVD_cover.jpg  West_of_Memphis_poster.jpg  p2.jpg


항소에 항소가 이어진 후, 결혼 12년째 되던 2011년 8월 데미안과 친구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단, 무죄로 풀려나는데 조건이 있었다. 아칸소주를 대상으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하지 말 것. DNA 증거로 수십 년 살다가 나와서 수천만달러의 피해보상금을 받아내는 뉴욕과는 다른 이상한 사례다. 

2012년 1월 피터 잭슨과 데미안 이콜스가 공동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웨스트 오브 멤피스(West of Memphis)’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이 영화는 희생자 소년 스티비 브랜치의 계부인 테리 홉스가 진범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그려나간다. 음악은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곡이 사용됐다.

2013년 '엑소티카'의 아톰 에이고얀 감독이 리즈 위더스푼, 콜린 퍼스 주연으로 영화 '데블스 노트(Devil's Knot)'을 연출했다. 영화는 2002년 출간된 논픽션 ‘Devil's Knot: The True Story of the West Memphis Three’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book2.jpg  book.jpg


그리고, 로리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남편 데미안과 남들처럼 진짜 부부가 되어 맨해튼 할렘에서 살고 있다. 포옹하고, 키스하고, 함께 잠들 수 있는 부부로서 당연한 것들을 결혼 12년 지난 후에서야 체험하게 됐다. 

18년간 철창 속에 있었던 데미안의 기억은 아직도 타임머신 캡슐 안에 있다. 
페이스북이나 투나 버거(tuna burger)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방인, 매일 친숙한 피자를 집요하게 먹어야 하는 데미안의 버릇은 아직도 청소년에 머물러있다. 그에겐 E.T.처럼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다. 

러브레터로 글쓰기의 달인이 되었을까? 
데미안은 지난해 수감기를 회고한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을 출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리고, 결혼한지 15년 째 이들은 러브 레터를 공개하기로 했다. 그간 주고 받은 수천통의 편지를 수록한 책 '영원히 당신의 것: 사형 대기수의 러브 스토리(Yours for Eternity: A Love Story on Death Row)'가 최근 발간됐다. 

건축가와 사형수의 18년에 이르는 연서 컬렉션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운명적인 로맨스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재판 체제와 편협, 부정의에 대한 경종일 수도... 

지금 로리와 데미안은 웨스트멤피스 사건의 진범을 찾는 한편, 다른 죄수들의 권리옹호에 관한 일을 구상하고 있다. 


뉴욕엔  800만가지 이상의 스토리가 있다. 
로리와 데미안의 믿어지지 않는 러브 스토리는 이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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