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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서촌 오후 4시
2014.06.09 23:05

(23) 오늘도 걷는다

조회 수 4863 댓글 1

서촌 오후 4시 (6)



오늘도 걷는다


 

여곡절 끝에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그리다 전경에게 쫓겨나기도 한 그림. 지난 4월 2일 ‘그림 그리길 허하라’와 4월 15일 ‘그림 그려도 된대요!’에서 이야기했던 그 그림 말이다.


한 달여간 미국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참여연대 그림교실 전시회 날짜가 잡혔다. 마감일은 다 됐는데 시차가 바뀌어 펜을 잡고 앉아도 일찍 곯아떨어져버린다. 최종 마감일 새벽. 스케치북을 다잡고 앉았다. 여기저기 명암을 더 넣어주고 가다듬어본다. 뭔가 부족하다. 영추문 앞으로 다시 뛰어나가 볼까? 찍어둔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 보다 문득 잡히는 게 있었다.



6메밀꽃 필무렵_before (2).jpg

'오늘도 걷는다'가 완성되기 전의 모습



전경! 어느 각도에서 찍은 컷이든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 풍경에는 혼자 이거나, 두명씩 짝을 지어 걷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보인다. 찬찬히 전경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먼저 실루엣을 그리고, 옷을 입혔다. 두 명이 다니는 팀을 그릴까? 하다 그냥 한 명을 그려 넣기로 한다. 조마조마했다. 전경이 들어가 그림이 엉뚱해지는 게 아닐까? 분위기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하하 근데 이게 웬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이 그림 속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화면이 꽉 차는 느낌이다. 활기도 느껴진다. 인왕산과, 메밀꽃 필 무렵과, 기왓집과, 2014년 서촌과 썩 잘 어울리는 풍경을 연출해낸다.



6메밀꽃필무렵_after (2).jpg

김미경, 오늘도 걷는다/2014, 40㎝x30㎝, 펜&수채



람 그리는 게 제일 어려웠다. 사람이 많은 풍경을 그릴 때도 사람은 빼고 풍경만 그렸다. 다른 사물에 비해 사람 그리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에 대해 고참 화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사람은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정교한 표정을 가졌다는 거,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잘 아는 물체이기 때문에 잘못 그리면 금방 알아채버리기 때문에 더 그리기 어렵다는 거...등등의 이유들을 들었다.

 


6린이 도서관 (2).jpg

Meekyung Kim, Olin Library/ 2014, 2014, 40㎝x30㎝, pen



지난 5월 딸이 다니는 미국 대학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그 대학 도서관을 그린 일이 있었다. 딸에 대한 애정을 담아 도서관을 한 땀 한 땀 그리는 일은 꽤 행복했다. 건물 창문 하나하나, 계단 한 층 한 층, 도서관 앞 잘생긴 나무 하나하나 열심히 그렸다. 그런데 마무리하려니 뭔가 허전했다. 나무 잎사귀도 좀 더 그려보고, 도서관 지붕에 명암도 더 줘봤지만 아무래도 심심하다. 그때 바로 무릎을 탁 치며 아하~!!! 도서관 앞 벤치에 학생 한 명을 그려 넣었다. 잔디밭에 누워 책을 눈높이로 세워 책읽고 있는 친구도,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친구들도 그려 넣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갑자기 도서관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때의 경험이 서촌 풍경에 전경의 모습을 그려 넣을 용기를 내게 불어넣어줬다.


그림 제목을 ‘인왕산은 알고 있다’ 로 하려다가 ‘오늘도 걷는다’로 정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말이다. 2014년 서촌을 기록할 때 서촌 곳곳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전경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한 풍경일 듯 싶다. 그들의 존재가 싫든 좋든 말이다. 그들도 매일매일 서촌을 걸으며 2014년 서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kimmeekyung.jpg 김미경/'브루클린 오후 2시' 작가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문과와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여성신문 편집장,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2005년 뉴욕으로 이주 한국문화원 기획실에서 일했다. 2010년 뉴욕 생활을 담은 수필집 '브루클린 오후 2시'를 펴냈다. 2012년 서울로 부메랑,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2014년 3월부터 화가로서 인생의 새 챕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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