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Modern/Contemporary Artists
2017.10.29 22:51

마크 로스코 자살 미스테리와 미술계의 음모 (1)

조회 수 13632 댓글 0

마크 로스코 자살 미스테리와 미술계의 음모 

Mark Rothko's Suicide Mystery & The Conspiracy <1>

마크 로스코 자살인가, 타살인가

 

2014-11-16-56286469hansnamuth19151990markrothko1964cibachromenationalportraitgallerysmithsonianinstitutionwashington-thumb.jpg

Hans Namuth (1915-1990), Mark Rothko, 1964, Cibachrome, National Portrait Gallery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1970년 추운 겨울날 아침 맨해튼 작업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로스코는 자살로 발표했다. 당시 딸 케이트는 19세, 아들 크리스토퍼는 6세. 유언 집행자 3인과 말보로 갤러리가 남편의 재산을 두고 음모를 꾸미는 것같다고 의심한 아내 메리 엘렌 로스코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사망한다. 

 

마크 로스코가 남긴 798점의 작품을 두고, 유언 집행자 3인과 말보로 갤러리의 신사 협정으로 로스코의 두 자녀는  작품 1점도 받지 못하게 된다. 아버지의 전 작품이 모두 말보로 갤러리에  싼 값과 부당계약으로 넘어갔다. 이에 딸 케이트 로스코의 소송이 시작됐고, 지난한 법정 투쟁 끝에 법은 선한 자의 편이 된다. 

 

로스코가 세상을 떠난지 47년. 그의 사망 당시 정황은 가수 김광석을 둘러싼 의혹의 죽음을 떠올린다. 유서 한장 남기지 않고, 면도날로 양팔 동맥을 끊어 피바다 위에 누운 로스코의 최후는 그답지 않은 종지부였다고 친구들은 말한다. 딸 케이트 로스코와 그녀의 변호사 에드워드 로스, 화가 아그네스 마틴과 헤다 스턴 등 친구들도 로스코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됐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로스코를 살해했을까? 케이트 로스코의 변호사는 여러가지의 가상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으나, 공개되지는 않았다.

 

로스코의 자살 미스테리와 말보로 갤러리의 음모를 2회에 거쳐 연재한다.

 

<1>마크 로스코, 자살인가 타살인가?

<2> 말보로갤러리와 집행자 3인의 음모

 

 

Consuelo_Kanaga,_Mark_Rothko._82.65.453-brooklyn-museum.jpg

Consuelo Kanaga, Mark Rothko, c1940, Brooklyn Museum

 

 

"나는 한 순간도 로스코가 자살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정신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은 자살할 수 없을 것이다. 명백히 로스코는 이익을 추구했거나,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화가), Art News, 1976-

 

"그건 쇼크였다.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린 것을 알았지만, 그럴 분이 아니었다. 또한, 유서를 남기지 않다는 이거야말로 더욱 아버지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편지로, 말로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자살은 정말로 이상해 보였다. 아버지는 무척 아픈 상태(*1968년 만성 고혈압으로 인한 동맥류를 앓았다)였다. 엄마가 전화로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었을 때, 자살을 언급하지 않아서 난 병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쇼크였다." 

-케이트 로스코(Kate Rothko, 마크 로스코 딸)-

 

"그는 누구인가? 내 친구 로스코를 죽인 사람은?"

-헤다 스턴(Hedda Sterne, 화가)-

 

 

01.jpg

1953년 마크 로스코와 멜 로스코. Photo: Henry Elkan

 

#1970년 2월 24일 리타와의 저녁식사

 

마크 로스코는 사망 전날 밤 리타 라인하트(Rita Reinhardt)와 저녁식사를 했다. 유대계인 리타는 흑면 회화(black painting)로 알려진 화가 애드 라인하트의 미망인이다. 1967년 8월 애드 라인하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로스코는 1969년 초 부인 멜과 별거에 들어가면서 리타와 연인이 된다. 그날 저녁 로스코는 다음날 말보로 파인아트(Marlborough Fine Art) 갤러리의 부회장 도날드 맥키니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작품을 고른 후 창고에 함께 가기로 했다는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이 약속은 두차례 연기된 것이었다. 

 

당시 톱 화랑이었던 말보로의 맥키니에 따르면, 로스코는 자신이 이미 작품을 많이 판 상태로 자신의 영혼(soul)을 판 것처럼 느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래서 말보로 측에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 보여주기를 꺼려했다는 것이다. 말보로와의 계약에서 로스코는 국내 판매는 자신이 직접 거래했으며, 말보로는 해외 판매만 맡았다. 하지만, 로스코는 말보로가 미국내 컬렉터들에게 팔아온 사실을 알게 되어 불신이 싹튼 상태였다.   

 

그날 로스코는 말보로가 1년 새 세차례나 작품을 판 것에 대해 불평하면서, 버나드 라이스(*로스코의 개인 회계사, 로스코재단 공동 디렉터 겸 말보로 파인아트의 디렉터 양다리 걸침)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며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리타 라인하트에 따르면, 라이스가 부추겨서 프랭크 로이드(말보로 대표)가 창고로 가서 자신이 오랫동안 보물시 해왔던 작품을 선정하도록 만든 것에 분개했다는 것이다. 로스코는 "도대체 라이스가 누구의 편인가?"라고 푸념을 했다. 다음날 로스코는 맥키니를 만날 예정이었다.  

 

 
IMG_2288.jpg 마크 로스코가 살며 일하던 스튜디오 외관.
 

# 1970년 2월 25일, 로스코 사망

 

추운 겨울 아침,  마크 로스코의 조수 올리버 스타인데커가 맨해튼 작업실(157 East 69th St.)에 도착했을 때 로스코는 피가 가득한 키친 바닥에 팔을 펼친 채 누워있었다. 로스코는 내복용 셔츠, 긴 파자마에 긴 검은색 양말 차림이었다. 그는 안경, 신발,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 바지는 의자 위에 걸쳐 있었다. 로스코는 양면 면도칼로 팔을 그었다. 처음엔 한쪽 날을 티슈로 조심스럽게 감은 후 면도날을 오른손에 쥐고 왼쪽 팔 동맥을 끊었다. 그후 면도날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오른팔에 더 깊게 그었다. 양쪽 팔꿈치 바로 아래 면도날로 벤 것이다.

 

스타인데커는 옆 건물의 화가 아서 리도프 작업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리도프는 즉각 로스코의 작업실로 달려와 싸늘한 시체를 보았다. 오전 9시 35분경, 이들은 경찰과 앰뷸런스를 불렀다. 인근 레녹스힐 병원에서 로스코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로스코의 심장 전문의 미드 박사가 와서 시체를 검사했고, 시체 주위의 피로 적신 공간을 측정(6x8ft)했다. 시체 옆에는 진정제와 수화물 마취제 빈병 두개가 놓여있었다. 미드 박사는 로스코가 최소 6-8시간 전에 사망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크 로스코는 66세였다. 

 

 

mark-rotko-studio-living-space.jpg

맨해튼 이스트 69스트릿 마크 로스코의 작업실 내부.  Photo: Morton Levine

 

로스코의 사망이 신문에 보도되기 전 지인들에게 알린 사람은 테오도로스 스타모스(로스코재단 공동 디렉터 겸 유언 집행자)였다. 그러나, 스타모스의 말은 바뀌었다. 어느 여성 화가에겐 아침 9시에 전화했다. 조수 올리버가 로스코의 시체를 처음 발견하기도 전이다. 큐레이터 캐서린 쿠에게는 이른 아침 전화해서 로스코가 약물과용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또, 필립 거스톤에겐 자신이 시체를 발견했다면서 로스코가 광란 상태였으며, 침실도 엉망진창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도착했을 때 침실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누가 말끔하게 치웠다는 말인가? 스타모스가 쇼크상태라서 횡설수설했을까?  

 

병리학자 5명이 참관한 가운데, 로스코 시신 부검이 시행됐다. 사인은 위팔동맥 절단으로 인한 출혈과 급성 바르비투르(진정제) 중독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부검에 참가했던 주디스 르호테이 박사가 이후 독성실험실에서 조직검사한 결과 진정제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또, 실험실의 수장이던 한 찰스 웅거버거 박사도 알콜과 기본적인 약물, 진정제의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다. 1975년, 케이트 로스코의 변호사는 부검 결과와 실험실 보고서가 다른 것에 대해 재조사를 요청했으나 담당 검시관 도미니크 J. 디 마이오는 무반응이었다.

 

혹자는 로스코가 우울증에 빠졌으며, 말보로 측에 판매 의뢰할 작품 선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날은 씨그램 빌딩 포시즌 레스토랑용으로 그린 벽화가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로스코는 포시즌용 작품 계약을 파기하고, 테이트에 기부했었다. 그날 로스코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1969.jpg Mark Rothko, Untitled, 1969

 

그러면, 왜 로스코는 자살했을까?

 

로스코는 아내, 자식들과 별거 중이었으며,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알콜중독에 골초였다. 로스코는 6개월간 그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미술계가 팝아티스트 등 젊은 화가들에 주목하는 것에도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는 설이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로스코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들 했다. 리 셀데스(Lee Seldes)는 저서 '마크 로스코의 유산(The Legacy of Mark Rothko)'에서, 폴 가드너(Paul Gardner)는 '케이트 로스코의 시련(The Ordeal of Kate Rothko)'에서 마크 로스코의 타살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1948년 친구 아쉴 고르키가 자살했고, 1956년엔 잭슨 폴락, 1965년 데이빗 스미스가 교통사고로, 1967년 애드 라인하트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에 로스코는 자신의 조수 조나단 에이헌과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자살을 택한다면, 모든 사람이 확실히 알게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게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로스코는 공식 유언장은 죽기 몇년 전에 만들었지만, (자살)유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또한, 심한 근시였던 로스코가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시체로 발견된 것도 납득되지 않는 일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 면도날로 양 팔꿈치의 동맥을 끊을 수 있었을까? 피 한방울조차 두려워하던 성격의 로스코가 피바다로 만들며 자살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딸 케이트 로스코도 변호사 에드워드 로스에게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로스 변호사는 타살로 믿고, 여러가지 음모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항간에는 마피아에 의해 살해됐다는 풍문도 있었다. 청부살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로스코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의견은 딸 케이트 로스코를 비롯, 화가 아그네스 마틴, 헤다 스턴 등 여성들이었다. 당시 미술계에서 로스코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곧 파워 갤러리 말보로에 대한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할리우드 프로듀서 하비 와인스틴의 30여년 성추행이 연달아 폭로되는 것도 그가 금력과 권력으로 침묵을 강요해왔기 때문이다. 

 

화가 로버트 마더웰은 말보로갤러리 대표 프랭크 로이드가 심술맞고, 악담을 불사하며, 치욕을 주며, 구석에 있는 학생처럼 취급한다고 불평했다. 말보로 소속이었던 마더웰은 어느날 프랭크 로이드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로이드는  "젊은이, 자네가 죽은 다음에나 부자가 될 걸세"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 로스코 장례식

 

2월 27일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프랭크 E. 캠벨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훗날 존 레논과 백남준의 장례식동 이곳에서 치러졌다.) 6살 짜리 아들 크리스토퍼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곡 '숭어'를 아버지가 누워있는 관 속에 넣었고, 19세 딸 케이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을 올렸다. 마크로스코재단의 디렉터이자 유언 집행자인 테오도로스 스타모스, 모턴 리바인, 버나드 J. 라이스는 로스코의 가슴에 꽃을 얹었다. 이 3인조는 후에 로스코 자녀들로부터 고소당하게 된다. 

 

 

장례식엔 그해 초 반신불수가 된 아돌프 고트리브을 비롯, 로버트 마더웰과 헬렌 프랭켄탈러 부부, 제임스 브룩스와 샬롯 박 부부, 필립 거스톤, 헤다 스턴, 바넷 뉴만, 리 크래스너 등 동료 화가들과  미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RothkoChapel.png

Rothko Chapel, 1964-1967 by Mark Rothko

 

# 1970년 8월 26일, 로스코 부인 사망

 

로스코 사망 6개월 후 부인 멜 로스코가 쓰려졌다. 아들 크리스토퍼는 옆 방에서 TV 만화영화를 보고 있던 중, 목욕탕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심장혈관계 질병으로 인한 고혈압'으로 알려졌다. 부검은 없었다. 케이트와 아들 크리스토퍼(애칭 '토퍼')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만다.

 

케이트 로스코는 그해 11월 아버지의 작품을 빼돌린 유언 집행자 3인(버나드 라이스, 테오도로스 스타모스, 모턴 리바인)과 말보로갤러리 대표 프랭크 로이드를 고소했다. 이 소송은 15년 후에야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영국 BBC에서는 1983년 로스코의 죽음과 소송에 관한 영화가 방영됐다. 리 셀데스의 저서 '마크 로스코의 유산'을 원작으로, 마이클 베이커가 시나리오를 쓰고, 폴 와트슨이 연출한 '로스코 음모론: 자살& 미술계의 사기(The Rothko Conspiracy - Suicide & Scams In The Art World, 1983)'는 유튜브에 올라 있다. 허나, 미국에서 방영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hqdefault.jpg

*The Rothko Conspiracy - Suicide & Scams In The Art World (1983)

 

Mercury Poizund라는 아이디는 영화 페이지의 댓글에서 "로스코는 약물을 먹인 후 살해됐다. 뉴욕의 의료감정 조사관이나 뉴욕경찰은 보스턴 경찰이나 보스턴 FBI 요원들보다 더 싼 가격에 매수할 수 있다"고 썼다. 

 

로스코의 죽음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미국에선 살인죄에 공소시효가 없다.(There is no statute of limitations on murder cases.) 

 

 

000.jpg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생애

*마크 로스코 필립스컬렉션(DC) 

*내셔널갤러리(DC) 마크로스코룸 Mark Rothko Ro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