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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18.02.04 21:30

(323) 스테파니 S. 리: 시간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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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35) 캠퍼스 나들이


시간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TraditionalCat.jpg

Traditional Cat, Stephanie S. Lee, Stephanie S. Lee, 2016, Color &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1˝ x 17˝ x 2˝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다. 다시 학생이 되기는 했으나, 맨하탄 캠퍼스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라 브루클린 메인 캠퍼스에는 갈 일이 좀처럼 없었다. 메인 캠퍼스 도서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게 되어 작품 전달차 정말 그림만 전달해주고 그냥 돌아서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동네를 한바퀴 돌아봤다. 못보던 시계탑이 새로 생겼고, 조각품이 몇개 늘어났고, 학교 앞 거리에 있던 가게들이 죄다 현대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학교의 모습은 눈물나게 여전했다. 메인 빌딩에 큰 불이 났었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불이난 건물도 다행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그대로인데… 잠시나마 열아홉의 나로 돌아가 학교 구석구석을 걸어다녔다.  


학교 수업이랑 겹치는 바람에 전시 오프닝에 가 보지 못한게 아쉬웠었다. 일요일에 무지개 베이글을 사먹으러 브루클린까지 나온 김에 다함께 모교 도서관에 들러보기로 했다. 남의 편과 딸 아이까지 데리고 21년전 처음 왔던 교정을 거니는 기분은 혼자 거닐었던 때와는 또 다른 묘한 기분이다. 


나무도 앙상하고 잔디도 다 죽어 볼품없는 겨울 캠퍼스인데도 딸아이는 마냥 신나서 조각품들을 봐도 와-! 시계탑을 봐도 와~! 하며 신나게 뛰어다닌다. 100년이 훨씬 넘은 엔진룸과 유리바닥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도서관의 모습에 잠시 감탄하더니 이내 고양이들 뒤를 열심히 쫒는다. 엔진룸이 따뜻해서 그런건지 건물이 오래되어 그런건지 딸아이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우리학교에는 유난히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 고양이 집도 만들어져 있고 수업 중에 고양이가 지나다녀도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하곤했다. 한창 궁금한게 많을 나이니 뭘 봐도 신기해 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엄마가 다니던 교정에서 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다. 



Clock Tower.JPG My Daughter at the Pratt Institute Brooklyn Campus  

Cat house.JPG Cat Houses


몇십년 전과 똑같은 모습의 교정에서 뛰어다니는 딸의 모습, 그 다소 현실감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21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교정도 나도 하나도 바뀐것이 없는듯 느껴졌는데 자꾸 내게 와서 말을 거는 아이를 보며 현실로 돌아온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인지, 뇌가 노화되어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사고의 깊이가 현저하게 얕아진 것 같다.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을 뿐더러, 어쩌다 생각할 짬이 난다해도 삶이 일상에 너무 동화되어 있어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육아는 끊임없는 interruption을 감내해야 하는 과정인지라 생각을 하다가도 흐름이 끊어지고 생각뿐 아니라 글도, 수면도, 식사도, 뭐든 다 조각조각 흩어진다.

 

나중에 주워모아 꿰어보고 맞춰보지만 이미 처음의 매끈한 생각은 될수 없고, 한번에 빚어낸 것보단 아무래도 흠이 많다. 하지만 애 밥도 안먹이고 사색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고,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하나… 하는 생각도 육신을 유지하려면 간과할 수 없는지라 어느 한 쪽이 반드시 더 낫다고는 할수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단순한 일들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집중력을 길게 유지할 수는 없을까 아쉽기는 하다. 사람은 뭔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미련을 갖기마련이니까…


모든 게 조각나고 얕아지긴 했지만 예전에 비해 배짱과 순발력은 좀 생긴듯 하다. 좋게 말하자면 그렇고, 다르게 말하면 좀 뻔뻔하고 드센 아줌마가 되었다. 왠만큼의 일이 밀려와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잘 버티며 요령있게 시간을 쓰는 것 같다. 아마도 심신이 매여버리는 육아라는 어쩔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생존본능에 입각해 어쩔수 없는 것들은 포기하는 법을 체득한 것 같다. 말도 더 많아졌다. 예전에 학교 다닐때 너무 조용히 다녔던게 후회되기도 하고, 비싼 수업료가 아까운 아줌마 정신이 발동하기도 해서 요즘에는 수업중에 맞던 틀리던 모르는게 있으면 다 이야기 하는 편이다. 



ModernCat.jpg

Modern Cat, Stephanie S. Lee, 2016, Color & gold pigment,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1˝ x 17˝ x 2˝  


학교에서 몇 블록 떨어진 내가 살던 집은 남의 편이 더 잘 기억한다. 이 빌딩이었나? 저 빌딩이었나? 비슷하게 생겨 헷갈리는데 자주 와보지도 않았던 남의 편이 이 집이네! 하고 알려준다. 저 집에서 쥐가 나왔었는데… 그때는 지하철이나 집에서 쥐가 나오면 어쩔줄 몰라하며 아파트 관리인한테 밤인지도 모르고 전화를 걸고, 한국에까지 전화를 걸어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떄 엄마가 “쥐에 물려 죽었다는 사람 못봤다. 안죽는다.”라고 한 말이 내심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뉴스에 보니 큰 쥐한테 물려죽은 아기 이야기도 나오더라만…) 


저 지하철 역에서는 Thanksgiving Day에 강도를 당했더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큰일 날 뻔 했던 일인데 그때는 그런일이 있은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같은 길로 잘도 다녔다. 뭐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도 했지만… 다들 집에서 저녁먹는 미국의 큰 명절인지 모르고 저녁시간에 외식을 하겠다고 아무도 없는 브루클린 지하철역에 차려입고 나간 나도 무모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나처럼 외국인도 아닌데 떙스기빙날 저녁에 돈이 없어 여학생 핸드백을 채 간 도둑도 참 불쌍하다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나니 쥐도 강도사건도 다 추억이 되는구나… 도서관 앞 양지에 자리를 잡고 먼곳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양손 가득 수업 준비물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뛰어 교정을 가로지르는 그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온전히 나를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았던 그때의 내가 부럽다. 


아이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많은 시간을 아이에게 쓴다. 물론 아이는 나에게 행복의 원천이자 유일무이한 사랑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나의 전부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데 내 삶이 통쨰로 아이에게 가 버리면 누가 나의 삶을 대신 책임져 주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는 더 이런 생각들을 하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어쨌든 21년 전 추운 겨울 혼자 교정에 떨어졌을때 보다는 그래도 셋이서 교정을 찾으니 따뜻하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겠지. 누군가가 그랬듯 시간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십대같이 분노하고, 십대때 처럼 모르는게 많다. 아직도 사람을 쉽게 믿고, 여전히 바보처럼 할말 못하고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다. 마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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