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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자/바람의 메시지
2017.06.21 12:24

(277) 김희자: 황홀한 고독

조회 수 773 댓글 2

바람의 메시지 (21) 인생 노트


황홀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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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iza Kim,  Solitude, 48"x13"x3", 2004, acrylic on natural wood with mirror


울을 힘겹게 버텨낸 숲의 나무들이 마치 하이테크 스크린 화면처럼 스스로 그려지는 한폭의 거대한 풍경화가 되어서 봄날의 광휘로움을 뽐내고 있다. 검은 가지마다에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오르는 노르스름한 겨자색으로 밑색을 칠하더니, 새 잎들이 솟아 넓어지며 연녹색으로 덧칠을한다, 차츰 진한 비취색으로 생기를 돋우고 진하지 않은 꽃색들을 뿌리며 그라데이션으로 향기를  섞는다. 고요한 화폭 같은 숲의 정적을 깨고, 새 한쌍이 요란스레 따라잡기를 하며 화폭을 흔들며 지나간다. 갖은 싱그러운 풀과 꽃향기가 진동을 하는 늦은 봄날이다.


하염없이 봄의 환희에, 내 자신이 나비라도  된듯 춤을 추다가도, 문득 함께 나눌 이 없는 홀로임을 느끼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누구나 꿈꾸는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지우(知音之友)의 친교랄 것까지는 못되나, 그에 버금갈 한 친구가 지구 반대쪽에 살고 있어서, 가끔  전화로 얘길 나누곤 한다. 아직 은퇴하지 못해 일이 많은 친구가 내게 하는 말이 "너는 황홀한 고독 속에 앉아 있으니 정말  부럽다"라고.  항상 매우 샤프한 감성의 친구이기에, 그 말의 뉘앙스를 어찌 해석을 해야할 지 약간은 혼돈스러웠다. 그 말이 에코가 되어 나를 감싸며, 참아온 감정이 깊은 바닥으로 부터 스크류가 돌아가듯 하면서 외로움과 서러움이 범벅이 되어 북받쳐 올랐다. 만약 담배가 있다면 반갑은 필 것 같다. 내 외로움의 가장 깊은 벗이 되어주었던 끽연을 건강의 적신호로  떠난 보낸지 꽤 오래 되었건만, 옛 습관의 귀신이 덮친다. 맞닥트리지 않으려고 꽁꽁 닫아둔 그리움들이 뚜껑을 열고 아카시아 꽃 모양의 팝콘이 되어 터져 나온다. 다행히도 끽연을 잊도록  달큰하면서도 씁쓸한 향기가 구멍구멍 마다로  마취제처럼 스며든다.


해마다 이맘 때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나를  향수병으로 끌어 넣어 그리움에 절여서 발효주를 담그곤 한다. 돌아갈 수 없을 길을 택하게 된 사유가 반은 미움으로, 반의반은 국가 경제재난이라 부르던 쓰나미에  떠밀렸고, 나머지는 스스로 모든 걸 포기해버리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삶을 시도 해 보고싶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참기 힘든 헤아릴 수 없는 굴욕의 순간들을 과일의 씨처럼 품고 살아왔다. 이젠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인지, 가까이서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더라는 긍정적 시각으로 돌려서 살게 될 정도의 숙성은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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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iza Kim, Ever-changing record, 96"x27"x4", 2007, acrylic on natural wood with mirror


제는 인생이라는 것이 보고있는 상황과 방향에 따라 달리보이는 오묘한 빛을 발하는 광석과 같구나하는 터득도 생겼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살던 내 집과 작업실에 묻힌 기억들이 늘 그리움의 샘을 깊게 한다. 평창동 뒷산 보현봉 아래로  5월 말경이면 자욱히 몰려 내려오던 그 아카시아 향이 지금 여기에까지 흘러와 나를 슬픈 노스탈지어로 만든다. 비가 오려는 듯 흐린 저기압인 날씨엔 산에 자욱한 꽃향기가 너무도 진하게 농축되어 마치 술에 취한듯 정신이 몽롱해지다가는 두통과 구토증이 날 정도였었다. 작업을 하다가 견딜수가 없어 두통약을 먹고서 운동 삼아 늦게 피는 산철쭉이 흐드러지는 능선을 따라 오르곤 했다. 멀리 한강이 보이는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서 단전호흡을 하며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옛 생각들이 아카시아 꽃이 되어 흩날린다.

                                                                                                                                                            

보이지 않는 손 끝에 메여 조종되는 퓨펫트 인형처럼 실에 메달려서 연기를 하며, 각본 속에서 그녀로 불리는 등장인물인 나에 대한 느낌은 언제나 부자유 속에서 기다림과 외로움 뿐인 꿈을 꾸는 한 여자의 역할이라 여겼었다. 그것이 숙명이고, 주어진 역할인지라 복종하는 삶만이 나를 만든 어떤 창조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칭찬받을 삶이려니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수없이 넘은 경험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손, 내 인생의 가이드로의 창조자는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만을 주어 세상에 내려보낼 뿐, 아무런 본래 의도가 있지 않았다는 걸 늦은 나이에사 터득하게됐다. 항상 궁금해서 몰래 열어보고 싶었던 신의 각본 노트는 빈 것이었다. 무엇도 씌여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한데 무얼 계획하고 기록할 것이 있었겠는지.


내가 듣고 배워 스스로 만든 의미와 인연 짓기였을 뿐. 그 노트는 내 스스로가 살며 기록해나가야 하는 빈 노트였다. 뭔가 기획된 것이 있지 않다면, 왜? 나는? 이렇게? 하는 의심으로 허송 세월을 보낸 어리석음이 후회스러웠다. 그나마 남은 세월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돌려서 십여년 마음의 자유를 얻고, 의심없이 사는 일상이 날마다 좋은 날이구나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엔 고독조차 황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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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iza Kim, Selflessness,11"x12"x3", 2015,  acrylic on natural wood with mirror

                                                                                               

20년 전만 해도 동양사람이라곤 눈비비고 찾아도 없는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해야할 때 무척 망설였다. 왜 고립을 자처하는 지를 나 자신의 심리상태도 알수가 없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땅하게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그냥 번잡스러운 곳이 싫었다. 그 즈음, 칼릴 지브란의 말에 강한 공감이 갔기에 나를 위무하며 내가 살고 싶은 이곳으로 떠나올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그들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러나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땐 얼마나 가까이 있게 되는지... 스스로를 고립시킨 자신이 늘 씹어야하는 외로움에서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면서부터 뭔가 가치로운 합리화를 해보려 애를 쓰는 나를 가끔 보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보고픈 사랑하는 자식들과 마음을 열 친구들은 자주 만날 수도 없는 지구 저쪽 편에 있는데, 여기에서의 고립이라할 거리가 무슨 대수인가라며 나를 설득시켰다. 달이 오르는 밤 외롭고 보고싶어 목소리라도 들으려 전화를 걸면, 그들은 해가 중천에 밝아 열심히 일하는 대낮이다. 머슥해져서 그립다는 진액같은 말은 삼켜버리곤 하며 마음으로라도 거리를 좁힌다는 용이함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을 느끼곤 했다. 외로움은 채워야 만족이 오는것이지만, 비워서 충만해지는 게 고독인 것을 차츰 깨달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꿈길에서나 만나리라 하며, 보내지 못한 편지 글만 쌓여갔다. 아마도 20대 초반까지쓰다가 여러 이유로 끊은 글쓰기가 자연스레 이어진 것도 고립감이 내게 준 선물일 꺼다.


내 마음을 '외롭다'해야 하는 건지 '고독하다'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철학적 규명을 해보고 싶었다. 외로움은 혼자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이란 외로운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정의하던데 반해, 정신분석학자 H. S. 설리번(Harry Stack Sullivan)은  인간이 어떤 관계 속에서 부정적으로 격리되어진 혼자됨을 외로움이라 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그 나름의 뜻이 있어 택한 긍정적인 홀로됨을 고독이라고 규명하고 있었다. 내 경우엔, 두가지 이유 모두가 믹스된 것이긴하지만, 참으로 공감되는 답인 것 같았다. '홀로 있고자 하는 욕구는 자신의 실존의식과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건강한 정신에서 솟아나는 힘'이라고 많은 철학자들은 정의한다. 그러나 선택한 고독일지라도 외로움은 깃들여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수많은 철학, 심리학자 시인들의 글들로 다리를 놓고 나는 고립의 강을 건너 그들도 살았었을 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이었기에 나를 나 다운 인간으로 강하게 만들수 있었다. 한동안 우울증이 원인이라는 지병들과 함께 심인성 환자 취급을 당하며 매우 괴롭게 지냈다. 외로움이 죄이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즐겁게 살아야 한다라는 처방을 받으며, 나는 사람들 속에선 외롭다 못해 괴롭다고 설명을 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이기주의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천성 속엔 너무나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두 가지가 늘 갈등 관계로 부딪히기 때문이니, 중도를 취하는 법을 의식적으로 노력하라고 전문 심리상담자는 말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고질적인 나를 비워내기 위해 독백같은 작품 만들기와 고해성사같은 글쓰기를 하며 자연의 기운을 의식적으로 흡수하며, 자기정화를 시도했다. 서서히 내면에 간직된 힘을 끌어내려는 용기를 만날 수 있었기에 지금의 고유한 나를 지킬수 있었다. 가끔은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있지만. 어쩌면 누구나 본래 가지고 있지만, 쓸일이 없어 개발되지 못하는 능력이 바로 고독이라는 사막 속에 뭍힌 광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빛이 휘황찬란할수록 외로움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짐을 보여주는 봄날의 고독을 응시하며, "인간은 고독 속에서만이 낡고 거짓된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난다"고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한 말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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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 

http://wheiza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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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rkDweller 2017.06.23 21:15
    사진으로 작품들을 보며 실제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거의 초현실주의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추상과 리얼리즘이 굉장히 흥미로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글도 참 좋습니다. 너무도 공감가는 글 이런 글을 쓰시는 분도 있구나 하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sukie 2017.06.24 00:42
    김희자 선생님의 글에서는 늘 치열한 작가정신과 삶에 대한 깊은 고뇌가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읽으면서 제가 잊어버렸던 우리말과 아름다운 묘사에 빠져들게 되어요.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붓터치 하나하나, 컬러 하나하나가 그러한 심연에서 나온 이미지인듯 하여 더 감동적입니다. 많은 글이 SNS 등지에서 클리넥스처럼 읽혀지고, 곧 버려지는 '순간적인 만족감'이 주류인 요즈음에 줄치면서 읽고, 두고두고 읽어볼 수 있는 보석같은 에세이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