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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와 어술라 오픈스의 기이한 인연 <상>


1969년 부조니 피아노 콩쿠르 미스테리

The Mystery of Busoni Piano Competition 1969


“내가 1등, 즉 우승자(the winner)였다. 

건우가 수상자 중 한명(a winner)이었을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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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Kun Woo Paik)                                         피아니스트 어술라 오픈스(Ursula Oppens)



나는 지금 유튜브에 오른 백건우씨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라단조 Op. 31 No. 2(Tempest, 폭풍) 3악장을 들으면서 이글을 쓰고 있다. 2009년 11월이었다. 맨해튼 한인타운 채식당 한가위에서 만난 뉴욕시립대(CUNY) 브루클린칼리지의 어술라 오픈스(Ursula Oppens) 교수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왜 지금 그해 겨울과 오픈스 교수가 떠올랐을까?  

2007년 학력위조로 미술계에 폭풍을 일으켰던 신정아씨가 최근 가수 조영남씨의 큐레이터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짓말을 쉽게 용서해주는 사회 덕분일까? 아니면, 그의 천부적인 배짱일까? 도덕성이 실종된 큐레이터와 그를 관용하는 사회라... 흠.

뒤이어 하버드-스탠포드대에 동시 입학한다는 수학천재 소녀 김정윤양 스토리가 미국 한인 커뮤니티와 본국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일주일도 안되어 거짓말임이 밝혀졌고, 특파원 출신 아버지의 사과로 끝난 해프닝이 됐다. 이어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씨의 표절 파문으로 문단에 회오리 바람이 부는 중이다, 


메르스(MERS) 공황상태인 한국에서 잇달아 들려온 뉴스들. 내가 6년 전을 회고하게 된 것은 '변방의 뉴욕'에서 고상한 클래식계를 둘러싸고 생겼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류와 혼란을 바로 잡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공인의 기록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ursularoppens1 (2).jpg Photo: Sukie Park


어술라 오픈스. 

6년 전 그녀를 만난 것은 1969년 부조니 콩쿠르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서였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2009년 11월 15일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열 예정이었고, 오픈스 교수는 그에 앞선 11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근처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센터에 리사이틀이 잡혀있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40년 전, 1969년 줄리아드 음대 재학생으로 이탈리아 볼자노에서 열린 부조니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게 된다. 



leaflet-front (2).jpg 2009 카네기홀 백건우 리사이틀 리플렛



공식 명칭 '페루치오 부조니 국제피아노 콩쿠르(Ferruccio Busoni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Concorso Busoni)'는 쇼팽(폴란드), 차이코프스키(러시아), 리즈(영국), 퀸 엘리자베스(벨기에) 콩쿠르와 함께 ‘빅 5’로 꼽히는 권위있는 피아노 경연대회다. 1949년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부조니의 사망 25주년을 맞아 창설된 후 해마다 열리다가 2004년부터 격년마다 열어오고 있다. 제 1회에서 거장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이 4위를 수상했으며, 1956년 열네살의 마우리지오 폴리니가 참가했으나 본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듬해 ‘피아노의 여신’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열여섯살의 나이에 우승을 차지했다.


백건우씨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앞두고 뉴욕한국문화원에서 기자회견이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뉴욕중앙일보의 문화 담당기자였던 필자는 기자회견을 위해 백건우씨 리서치를 하다가 블로그 고 클래식(Go! classic)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했다.


"부조니 콩쿠르가 두개인지... ㅡㅡ; 부조니 콩쿠르 홈페이지에서 역대 수상자를 보니(http://www.concorsobusoni.it/eng/index_exp.htm) 1969년 우승자에 백건우씨가 아닌데...

어떻게 된건 지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앞뒤로 몇 년치 다 봐도 백건우씨 이름이 없어서... (200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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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후 부조니 콩쿠르에서 한인 피아니스트들이 속속 수상하면서 네티즌 사이에서 백씨의 수상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생긴 것 같았다. 2005년 질문에 2009년까지 아무도 답글을 올리지 않았다. 


2015년 6월 중순까지도 댓글도 답글도 없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아무도 백건우씨와 부조니 수상에 대해 확인해줄 수 있는 이가 없을까?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건반 위의 구도자’ '건반 위의 순례자' ‘건반 위의 시인’으로 불리워온 백건우씨의 경력에는 1969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혹은 금상(메달) 수상이 늘 따라 다녔다. 그러나, 2009년 11월 부조니 콩쿠르 홈페이지에서 1969년 수상자 명단을 찾아보니‘1위 어술라 오픈스(미국), 2위 안나마리아 치콜리(이탈리아), 3위 아키코 기타가와(일본), 4·5위 수상자 없음’으로 나와 있었다. 백씨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2015년 6월 웹사이트가 바뀌었다.) *Wikipedia의 부조니 수상자 리스트



1969년 부조니 피아노 콩쿠르 본상 수상자들                                                                    


Ursula-Oppens (2).jpg 어술라 오픈스(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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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마리아 치콜리(2위)                              아키코 기타가와(3위)



의문이 생겨서 조니 콩쿠르재단에 이메일을 보냈다. 재단의 실비아 토레신씨로부터 답변이 왔다.


“1969년엔 심사위원들이 유일하게 결선 진출자 중 백건우씨에게 금메달을, 폴 크로슬리, 스텔라 디미트로바, 로저 L. 쉴즈에게 공동으로 은메달을 시상했다. 이들은 오케스트라와 하는 최종 결선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순위에서도 빠졌다.”


즉, 본상 외에 장려상 혹은 특별상에 해당되는 금메달을 수상했지만,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최종 본선까지는 가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도 백씨는 금메달로 한인 최초의 부조니 입상자가 되었다. 


그런데, 백씨의 부조니 금메달은 어느새 올림픽의 금메달처럼 1등으로 오해가 되었고, 부조니 우승자로 널리 퍼지게 됐다. 그 출처가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기 때문이건,  홈페이지에 올린  바이오(bio)였는지, 홍보 담당이나 기자들의 잘못된 번역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백건우씨의 한글 경력을 소개한 페이지(http://kwpaik.joyclassic.com)는 폐쇄된 상태였다. 2007년 신정아 게이트(학력위조) 이후 학력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유명인사들이 상당수였다. 


지금도 백건우씨는 공식 웹사이트가 없다. 하지만, 백씨의 바이오 페이지에서 복사한듯한 인물 정보가 포탈 사이트와 언론사 인물정보 등에 남아 있었다. 어느 곳에서는 '부조니 우승'과 '부조니 금상'이 연달아 나왔다.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 당선작은 김동준씨의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음악세계'였다. 그가 참조한 정보도 부조니 콩쿠르 '우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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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신춘문예 1999 <음악평론>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음악세계, 김동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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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음악가를 5명정도만 알려주세요. (2004. 8. 21) <네이버 지식iN>




부조니우승-곽근수.jpg 곽근수 음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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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듣는 바흐…백건우 '바흐-부조니' 앨범 /중앙일보 <2005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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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 이듬해인 2008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백건우씨는 직접 부조니 콩쿠르 우승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건반위의 순례자’ 백건우/ 서울신문 <2008.12.1>



그러면, 1969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인 어술라 오픈스는 어디에? 


궁금해서 조사해보니 오픈스는 뉴욕시립대학교의 교수였고, 우연히도 백건우씨와 같은 주에 뉴욕에서 리사이틀이 예정되어 있었다. 1969년 부조니 콩쿠르 1위와 4위, 줄리아드 음대 동문이 40년 후 뉴욕에서 여는 콘서트. 흥미로웠다. 백건우-어술라 오픈스의 랑데부는 어떤가? 오픈스 교수를 만나고 싶었다. 이메일을 보냈더니, 흔쾌히 OK했다. 우리는 맨해튼 한가위에서 만났다. 


“내가 1등, 즉 우승자(the winner)였다. 건우가 수상자 중 한명(a winner)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날 저녁 오픈스 교수는 자신이 1969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였다고 확인해주었지만, 뜻밖에 자신의 우승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러시아 출전자들이 없어서 내가 우승했다고 생각한다. 그 옛날 콩쿠르 수상은 별로 의미가 없다.”

밴 클라이번은 1958년 미소 냉전기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러시안들을 제치고 우승했지만, 예브게니 키신은 한번도 콩쿠르에 나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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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뉴욕에 온 백씨는 뉴욕예술고등학교(High School of the Performing Arts)에서 공부하면서 줄리아드 예비학교를 거쳐 1965년 줄리아드에 입학했다. 어술라 오픈스는 래드클리프대(하버드로 편입) 영문과를 거쳐 1966년 줄리아드에 들어가 백씨와 함께 전설의 로지나 레빈 교수를 사사했다. 이때 오픈스는 레빈 교수의 피아니스트 남편 이름을 따서 제정된 조셉 레빈(1874-1944) 장학금(Josef Lhévinne Scholarship)을 받았다. 백건우씨의 바이오에는 1971년 조셉 레빈 상 수상 경력(Bach-Cantatas/ 호암상 수상자 프로필)이 나온다. 


오픈스 교수는 비빔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조심스럽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건우는 매우 시적이며,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특별히 ‘외국인’처럼 느껴지지 않아 우린 친하게 지냈다. 프랑스 영화배우와 결혼했다고 들었다.”



ursula3 (2).jpg Photo: Sukie Park


뉴욕에서 음악학자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오픈스 교수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다. "음악 말고 ‘다른 세계’가 궁금해 하버드대로 가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경제학을 두루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는 테크닉보다 인성을 중시하는 로지나 레빈 교수의 철학이기도 하다. 어느 날 평생 걸어야할 길이 피아노 연주자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그녀는 하버드(*래드클리프 통합) 졸업 후 줄리아드에 입학한다. 그리고 스물다섯이던 해 부조니 콩쿠르에 출전한다. 이때 스물 세살의 백건우씨도 부조니에서 경연하고, 수상한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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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에서 1971년 어술라 오픈스 교수의 리사이틀을 리뷰하면서 1969년 부조니 콩쿠르 우승을 언급했다.



1971년 오픈스는 뉴욕 리사이틀로 뉴욕타임스의 찬사를 받았다. 그해 5월 오픈스는 리벤트리트(Leventritt) 콩쿠르에서 백건우, 이대욱씨와 함께 준 결선 14명에 올라 경합했다. 이중 백건우씨는 최종 4명이 오르는 결선 진출자(finalist)가 되어 오픈스를 제압했으나, 그해엔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때로 백건우씨의 바이오엔 리벤트리트 콩쿠르 특별상 수상자도 나온다. 


1941년 업스테이트 뉴욕 콜드스프링에서 창설된 리벤트리트 콩쿠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밴 클라이번(1954), 이자크 펄만(1964), 한동일(1965)씨와 정경화(1967)씨가 우승한 바 있다. 1976년 미츠코 우치다가 결선에 진출했지만, 우승자를 뽑지 않았다. 마지막 콩쿠르는 1981년에 열렸다. *위키피디아 리벤트리트 우승자 명단


오픈스는 줄리아드 대학원 졸업 후 엘리엇 카터, 존 코리글리아노, 토비아스 픽커 등 현대 작곡가들의 곡을 집중적으로 연주해오며 뉴 뮤직의 선구자로 평가됐다.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걷던 그는 50세인 1994년부터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2008년 CUNY 브루클린칼리지의 교수로 임용되면서 고향 뉴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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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리벤트리트 콩쿠르 준 결승 진출자 14인을 알리는 뉴욕타임스 기사. 어술라 오픈스, 백건우, 이대욱 등이 올랐다.



2001년 오픈스 교수는 부조니 콩쿨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그해엔 조혜정씨가 2위, 임동민씨가 3위를 석권했다. 오픈스 교수는 "얼마 전 어느 학생이 부조니 콩쿠르 입상이라고 서류에 써왔던데, 확인해보니 거짓이라서 놀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재능있는 아시안 연주자들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아시안 연주자들이 없는 클래식 음악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작곡가 윤이상씨와 진은숙씨의 곡을 좋아한다”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와 협연했던 그는 작곡가 나효신씨, 피아니스트 이소연씨, 한인 3명이 소속된 파커스트링쿼텟에서도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녀를 만난 그날 한가위의 단호박 돌솥 비빔밥은 달달하지 않고,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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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스 교수와 헤어진 몇 년 후 CUNY 대학원 센터에서 열린 현대음악 콘서트에 갔다.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가 연주했고, 100세 가까운 작곡가 엘리엇 카터가 객석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콘서트였던 것 같다. 카터씨 근처에 오픈스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오픈스는 카터의 음반도 냈다. 멀리서나마 그녀가 반가왔지만, 'Hi'라고 인사할 수 없었다. 그녀를 피했다. 미안했다. 내가 그녀의 부조니 우승을 훔쳐간 것처럼 면목이 없었다. 


지난해 3월 맨해튼 심포니스페이스에서 어술라 오픈스 교수의 70회 생일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에서 2010년 나움버그콩쿠르 1위 수상자인 한인 이소연씨와 윈스턴 최씨도 축하 연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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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시 부조니 웹사이트에 가보았다. 

새로 단장한 웹사이트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1969년 수상자 명단(Laureates) 페이지에 마침내 백건우씨가 올라와 있었었다.

1위 어술라 오픈스, 2위 안나마리아 치콜리, 3위 아키코 키타가와, 그리고 'Kun Woo Paik (Selection prize),  폴 크로슬리(Paul Krossley, gold medal)로 백씨는 특별상이나 장려상으로 여겨지는 selection prize, 금메달 수상자는 폴 크로슬리로 나왔다. 그러면, 백씨가 금상(금메달)이 아닌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부조니 재단에 6년만에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웹사이트 관리자의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피아노 치는 것도, 비행기 타는 것도 매우 특별한 일이었던 그때의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오류. 그러니, 재단 사람들보다 당시 금메달 수상자인 폴 크로슬리가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인터넷 리서치를 해보니 Paul Krossley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Paul Crossley씨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당신이 1969년 부조니 콩쿠르 금메달 수상자가 맞나요?"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busoni-5-paul-crossley-600wide05-300.jpg 폴 크로슬리씨


"내 기억으로는 건우가 4등, 내가 5등상을 받았다. 나는 메달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물론 집에도 메달이 없다. 만약 금메달이 있었다면, 1등(어술라 오픈스)에게 주지 않았을까? 웹사이트를 보니 내 이름 스펠링도 틀렸다. 확신하건대 웹사이트에서 실수가 일어난 것 같다. 다른 해의 수상자들을 보니, '메달'이 없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금메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키피디아의 어술라 오픈스 교수 바이오에는 부조니 금메달 수상으로 나와 있다.

부조니 콩쿠르 재단에 보낸 이메일의 답장은 6월 17일 현재까지 오지 않았다. 웹사이트에는 여전히 폴 크로슬리씨가 금메달로, 백건우씨가 Selection prize로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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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백한 것은 1969년 부조니 콩쿠르의 우승자(1위)는 어술라 오픈스였으며, 백건우씨는 4위에 해당하는 금메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백건우씨는 2000년 '학술, 예술, 인류 복지증진에 공헌한 인사들을 위한' 호암상을 수상했다. 최근 표절논란을 일으킨 소설가 신경숙씨도 2013년 호암상을 받았다. (상금은 2010년 3억으로 올랐다.) 수상자 백건우씨의 프로필 한글 페이지에는 부조니 금상이지만, 영문 페이지엔 부조니 콩쿠르 1위(First Prize)로 나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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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부조니 콩쿠르 4위 이대욱 교수                             1980년 부조니 콩쿠르 1위 없는 공동 2위 서혜경씨


☞ 부조니 콩쿠르

1949년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부조니의 사망 25주년을 맞아 창설된 국제 피아노 경연대회. 해마다 열리다가 2004년부터 격년마다 열며 5∼7등까지 수상한다. 제 1회에서 거장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이 4위를 수상했으며, 1956년 열네살의 마우리지오 폴리니가 참가했으나 본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듬해 ‘피아노의 여신’ 마사 아거리치가 열여섯살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한인으로는 1969년 백건우씨가 등외 금메달을 수상한 것을 비롯, 1972년 이대욱 한양대 교수가 4위, 1980년 서혜경 경희대 교수는 1위 없는 3인 공동 2위, 같은 해 손은수 한양대 교수가 5위를 수상했다. 이후 김원미(88, 5위), 최희연(90, 4위), 김정은(95, 4위), 박종경(96, 4위), 이윤수(97년, 1위 없는 2위), 캐나다계 한인 캐서린 지(98년, 3위), 손민수(99년, 3위), 임동혁(2000년, 5위), 조혜정(2001년, 2위), 임동민(2001년, 3위), 박종화(2003년, 4위), 김혜진(04-05년 3위), 러시아계 한인 마리아 김(06-07, 4위), 이선호(08-09, 5위)씨 등이 입상했다. 그러다 올해 9월 문지영씨가 한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4위는 홍민수씨가 수상했다. http://www.concorsobusoni.it


<업데이트>


고! 클래식 

[답변] 백건우씨... 1969년 부조니 콩쿠르 금메달... 


*무려 10년 전의 질문 글인데 다른 곳에서 답글을 보게 되어 대신 올려 봅니다. "해외 동포는 회원가입 인증 절차(*나의 셀폰 회사가 AT&T)가 까다로워 답글을 올릴 수 없었다"고 하네요.


조성진과 함께 쇼팽 콩쿠르에 나갔었던 문지영이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다가 지난달에 있었던 2015 부조니 콩쿠르의 우승 소식과 연관되어 검색된 글입니다. 무척 좋아하는 분인데 다시 보게 되는 부분이 있네요. 특히 아내분인 배우 윤정희 씨의 반응은 참 씁쓸합니다.


2012년 게르기에프와 LSO의 내한 연주회 때 마추에프의 앙코르 후 난데없이 웬 여아가 나와 라벨을 연주한 퍼포먼스를 본 이후로 게르기예프를 탐탁잖게 생각하는 것, 그날 객석에서 백건우 씨 부부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던 것, 커튼콜 때 윤정희 씨가 남편에게 (마치 게르기예프를 만나러 빨리 가자는 듯이) 채근하는 듯했던 모습, 그러고 끝나고 나오다가 백건우 씨 부부가 (아마 게르기예프를 만나러) 공연 관계자 출입구로 들어가는 걸 봤던 기억, 그러다가 최근에 백건우 씨가 게르기에프의 내한 공연에 협연하기로 된 것을 본 것 등이 떠오르며, 왠지 그런 것들마저 씁쓸한 시각으로 보게 되기도 하고요.

-bb***- (2015/10/22)

http://www.goclassic.co.kr/club/board/viewbody.html?code=qanda&page=1&group=20523&number=325713&keyfielda=&keya=&keyfieldb=&keyb=&andor=



*백건우씨의 과장된 우승 경력이나 이를 바탕으로한 성공기반의 마련의 기회를 해부한 좋은 기사입니다. 백건우씨의 수많은 국내 팬들에게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사가 되겠지요.


하지만, 추측하건데 백건우씨 경력이나 우승대신에 금메달 소식은 당시 국내에서 줄리아드를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시던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다들 아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워낙 약소국이어서 해외에서 준우승을 하더라도 (정명훈) 김포공항에서 시청앞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해주고 남자의 경우 병역 면제도 해주던 그런 아득한 시절이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우르술라 오펜스 여사는 독일 오스트리아에도 잘 알려진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명도에 있어서 아직도 백건우씨보다 한 등급위입니다. 백건우씨는 적어도 독일어권에서는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해석가나 실력가들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런 케이스를 전수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국내 연로하신 이미 은퇴한 음대교수들 캐리어도 과장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현재는 이미 정년퇴직한 모 대학 여자교수님의 박사논문을 읽고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유학 5~6 년 만에 전공을 바꾸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논문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을 처음 접하고 20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이 논문이 돈을 주고 대필된 박사학위 논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해당 여교수는 이 대필 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쉽게 교수직을 얻었고 무사히 정년까지하였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불의가 정의를 누를 확률이 적어도 절반이상이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세삼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1y***- (2015/10/23)

http://www.goclassic.co.kr/club/board/viewbody.html?code=qanda&page=1&group=20523&number=325714&keyfielda=&keya=&keyfieldb=&keyb=&an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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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스토리 <103> 줄리아드가 뭐길래? 백건우씨에게 궁금한 것들

*뉴욕 스토리 <78> 1천만불 짜리 앵커 브라이언 윌리엄스의 거짓말 서사극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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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17.11.19 18:23
    반사이익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의 정직성에 관한 문제 제기입니다. 교수가 되려면, 학위 증명서가 필요하겠지요?
  • ㅠㅠ 2017.11.19 11:54
    백건우 어휴 이거 완전 사기꾼이로구먼
    윤정희는 언제 봐도 비호감 ㅎㅎㅎ
  • sukie 2017.11.19 15:36
    그분은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우지요:) 사모님은 시나리오의 대사가 아니라 본인의 대사라서 리얼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