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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New Yorkers

 

<3> 이준행 (Joon Heng Lee) 서울대 뉴욕동창회 골든클럽 회장 

 

늘 푸른 소나무같은 우리 시대의 어른

 

 

"나이가 20세던 80세던 누구든 배움을 멈추는 이는 늙은 것이다. 

항상 배우는 자는 젊게 산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당신의 마음을 젊게 유지하는 것이다."

-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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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4개 국어는 할 줄 알아야 기가 죽지않는다는 이준행 서울대 뉴욕동창회 골든클럽 회장.  Photo: Sukie Park

 

 

"예순다섯살 때 베를리츠 어학원(Berlitz Language Center)에 이태리어를 배우려고 등록했지요. 그랬더니 원장이 '왜 배우려고 하느냐?'고 묻더군요. '이태리 가냐?' 'No', '그럼 관광갈꺼냐?' 'No', '이태리와 사업을 하냐? 'No', '그럼?' 나의 대답은 'That is an invisible education to the children.'이었지요."

 

서울대 뉴욕 동창회 골든클럽(Golden Club)의 이준행(Joon Heng Lee, 86) 회장은 4개 국어를 한다. 대부분이 영어로 소통하기에도 고단한 이민생활에서 그는 유창한 영어와 일어에 이태리어까지 구사한다. 손녀들이 불어와 이태리어를 본토인처럼 하는 것도 할아버지가 몸소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야코(*기)' 죽지 않으려면, 언어가 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유럽에 여행 가서도 불어나 이태리어를 해야 위축되지 않고, 안써먹더라도 알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교육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준행 회장은 한국에서 '호랑이 아버지(Tiger Dad)' 였다. 

1974년 초등학교 4학년짜리 막내 아들을 영국의 명문 사립교 오캄(Oakham School)에 유학보냈다. '조기유학'이라는 용어가 없던 그 시절 엄친(嚴親)은 11살짜리 아들을 타국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 일본과 LA, 뉴욕을 거쳐 비행기 혼자 타는 연습까지 차근차근 훈련시켰다. 홀로 공부하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게 하려고 매일 소년동아일보를 보내고, 매일 한글로 일기를 쓰게 했다. 그 아들은 유일한 아시아계 유학생으로 줄곧 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는 런던스쿨오브이코노믹스 경제학 박사를 거쳐 귀국해 현재 대기업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인들이 영어만 잘 한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예요. 

모국어를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것을 잘 해도 소용없어요." 

 

 

2013 제6회 서울대 미대 뉴욕 뉴저지 동문 전시회 오프닝 행사,.jpg

2013년 서울대 미대 뉴욕/뉴저지 동문 전시회 오프닝에서 후배들과 함께.

 

 

서울대 섬유공학과 48학번인 이 회장은 60세 이상 동문들로 구성된 골든클럽의 최고령자이자 '기둥'이다. 골든클럽은 뉴욕에서 가장 스태미나가 넘치는 한인 동창회 중 하나일 것이다. 매월 골프, 산행, 광어 바다낚시 등 다양한 모임을 열고, 뉴스레터와 주소록까지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이준행 특지 장학금을 수여해오고 있는 씽씽클럽. 이 회장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5년째 회장을 연임해왔다.

 

지난해 이 회장이 한미충효회의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한 것도 그가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어버이'일뿐 아니라 우리시대 절실하게 필요한 '어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 속의 방향 표지판, 바닷가의 등대처럼 인생의 바른 길을 안내해주는 쿨 뉴요커, 이준행 회장의 열정을 만나본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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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서울 신설동에서 태어난 이준행 회장의 어릴 적 꿈은 '대통령'이었다. 양정중학교 시절 럭비를 했고, 1948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상공부에서 일하다가 1957년 유럽으로 유학간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1년, 영국 레스터(Leicester)에서 2년 유학하고 돌아가 양말 수출사업을 하다 우연히 가발업으로 선회하게 된다. 

 

1971년 뉴욕에 가발회사 준이 커머셜 컴퍼니(Junee Commercial Co.)를 세워 미주 한인 가발사업을 개척했다. 델리, 세탁업, 네일업 등이 뉴욕 한인들의 주업종이 되기 전의 일이다. 그후로 오늘까지 회사는 맨해튼에서 퀸즈 롱아일랜드시티로 옮겼다. 롱아일랜드 벨모어(Bellmore)에 사는 이 회장은 아침에 집 근처 존스 비치에서 운동한 후 회사로 출근하는 현역 사장님이다. 

 

 

-어떻게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되셨어요?

"그땐 섬유과가 인기 있었지요. 졸업하기 전에도 월급 주며 데려가던 때니까. 졸업 후 고등고시 패스하기보다 어렵다던 상공부에 들어갔지요."

 

-대학 때 무용도 배우셨다구요?

"옛날 공과 다니면, '기름 강아지'라고 불러 취미생활이 있어야할 것 같았어요. 무용을 배우면, 무용을 감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전무용 배우러 장추화 연구소에 1년 다녔어요. 양정중학 1년 선배인 무용계 원로 송범씨와 배웠지요. 선배들이 졸업 환송회 때 무대에서 한 커트하라고 그러더군요. 나는 무대에 서려고 무용 배운 게 아닌데, 선배들의 압력이 하도 심해서 국악원에 가서 석달 동안 초립동이까지 배우며 준비를 했지요. 그런데, 프로그램이 바뀌어서 결국 공연은 못했지만."

 

-한국전쟁은 어떻게 겪으셨어요?

"우리는 대가족이었는데, 아버님은 식구들을 나누어서 피난시켰어요. 한 그룹은 대전으로, 나는 외가집인 용인으로 가는데 속해있었지요. 만일 가족이 몰살을 당하더라도 한 그룹을 살리시려고 그렇게 하셨지요. 피난 갔다가 미군부대에 들어갔고, 부산 보급창(PX)에 취직했지요."

 

-영어는 미군부대에서 배우셨어요?

"학교 다닐 때 시립도서관에 있는 English Language Institute에 다녀서 딴 친구들보다는 조금 나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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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행 회장은 50-60년대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유학했다. 록펠러센터 펜할리곤 부티크 앞에서.

 

 

-어떻게 유학을 가게 되셨나요.

"상공부에 4년 근무하다가 나와서 처음엔 이태리 밀라노로 가서 섬유 기계를 배웠고, 1년 있다가 영국으로 갔지요. 런던에서 1시간쯤 떨어진 레스터(*Leicester)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했지요. 그때 일본 유학생이랑 하숙을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어요."

 

-당시 유학생활은 어떠셨어요?

"레스터에서 공부할 때 향수병이 심했지요. 그땐 한국에 편지하면 한달 걸렸어요. 하숙집에서 6시에 저녁을 먹고, 나가서 서쪽으로 가면, 우리나라고 간다는 걸 알아서 계속 서쪽으로 걸어갔어요, 그러다 막히면 옆으로 가고, 다시 서쪽으로... 6시에 나가 새벽 1시에까지 걷다가 지치기도 했지요. 얼마나 제 나라가 그리우면 그렇게 했을까."

 

-1970년대 막내 아드님(현 대기업 부사장) 조기유학이 성공 사례로 꼽히겠어요. 

"그때는 '조기유학'이라는 말도 없었지요. 내가 영국에서 공부를 했고, 영국인들과 비지니스를 하면서 해마다 집에 영국에서 손님들이 왔어요. 어느 날 우리집에서 태권도 2단자, 블랙벨트였던 막내가 시범을 보였더니, 손님들이 놀라면서 '아들이 셋인데, 하나는 영국 보내라'고 하더군요. 그때 막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는데, 그후 "아버지, 제가 장래를 위해서 영국 가겠어요!"라고 해서 보내게 됐지요."

 

-그 시절, 그 나이에 혼자 유학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오캄(Oakham School)으로 막내를 데리고 가면서 가족들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아두었지요. 누구도 눈물 보이는 사람 있으면, 내가 용서 안한다고 했어요. 내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니깐 그렇게 됐지. 지금은 종이 호랑이가 됐지만. 김포공항에 나갔는데 식구들이 다 나왔고,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막내가 들어가다가 코너를 돌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하고 공항이 떠나가라 하고 소리질렀지요. 얘가 나더러 '식구들은 집에 들어가 이불 뒤집어 쓰고 실컷 울거얘요'라고 하던데, 저도 그런 기분이라는 것이지요. 나는 애를 적응시키기 위해 먼저 일본에 가서 친구집에 일주일 머물렀어요, 서로 말도 안통하는 친구의 아들과 헤어지면서 서로 울더라구요. 

 

다음에 LA에 가서는 이틀 있다가 막내 혼자 두고 나 먼저 뉴욕으로 왔지요. 다음 날 혼자 비행기 타고 오라고 연습을 시키려고. 내일 못만나면 고아가 되는 거야. 그랬더니 혼자 잘 타고 뉴욕까지 왔더라구. 그리고, 뉴욕에서 다시 일주일 있다가 영국으로 갔지요. 애가 서서히 적응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어요. 바로 영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서서히 변화를 시켰어요. 갑자기 큰 변화를 주면, 애들이 돌고 회복을 못할 수 있어요. 돌지 않게 부모가 관리를 해주어야 해요. 부모가 그렇게 안하면, 아이들은 옳게 기를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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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행 회장은 2015년 한미충효회(회장 임현빈)가 선정하는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트레이닝을 시키신 건 회장님께서 유학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럼, 내가 경험해서 외국 나가 공부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지요. 그래서 밀라노에 있는 손녀 딸 만나러 집 사람과 매년 갑니다. 손녀딸 데리고 여행도 다니고. 아무리 여건이 좋아도 향수병은 막을 길이 없어요. 지금은 전화, 이 메일 쉽게 하는 시대인데도 향수병은 어쩔 수 없지요. 부모님이 유학하는 아이들을 관리를 해주어야 해요."

 

-어떻게 열한살 짜리를 혼자 두고 오셨어요?

"그때 막내를 레스터 친구집에 두고, 나는 호텔에 묵었지요. 밤 12시가 넘었는데 친구한테서 호텔로 전화가 왔어요. 우리 애가 잠을 못자고 세번씩 자꾸 TV를 보러 내려오더라고. 그러더니 "제발 하룻 밤만 아버지와 자게 해달라"고 간청하더래요. 아들와 통화를 하면서 '야 이눔의 자식, 너 그따위로 하려면 서울 다시 가!'라고 야단을 쳤더니, "아버지 이번 한번만...."하고 울길래 '한번만'이라 다짐을 받았고, 새벽 1시에 친구가 애를 호텔로 데려왔어요. 그런데, 애를 보니 내가 눈물이 나더라구요. 막내가 '아버지 울었다!'고 하면서 '난 아버지 보는데선 안울었다'고 그러더군요. 막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울었지. 옆에 앉은 사람이 도대체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우는지 의아해 하더라구요."

 

-1970년대면 전화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옛날 서울 가정 전화요금이 6-7천원인데, 난 40만원을 냈어요. 매 주말에 체신부에 국제전화 신청을 했어요. 아침에 신청하면, 저녁 때 연결해주는데, 홍콩 교환수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또 런던에서 오캄 학교로 연결해주면 서로 목소리도 잘 안들렸지요. '엄마!''아버지!' 'XX야!'하고....매주 그렇게 전화를 했으니. 모국어를 잊지 않게 해주려고 형들이 소년동아일보를 하루도 안빼놓고 국제 메일로 보내주었어요. 그때, 신문값 80원할 때인데, 우송료가 160원이었지요. 그리고, 일기를 매일 쓰게 했어요. 한글로 일기를 쓰면 하루 에 30펜스를 준다고 했지요. 석달 채워서 은행 구좌에 꼬박꼬박 넣어주었지요. 애가 열다섯살 때까지 모은 돈이 많아져서 '너 자동차도 사겠다'고 말했더니, 막내가 '자기 아들 유학시킬 돈이 될 때까지 차 안사겠다'고 하더군요. 하하." 

 

 

모국어를 잊어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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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대 동창회 장학금 수여식에서 이준행 특지장학금과 동창회 장학금을 동부지역 유학생들에게 시상했다.

 

 

-유학 중 아드님을 자주 만나셨나요.

"유학 보낸 후 뉴욕에 스튜디오 하나 얻어 놓고, 애가 갖고 놀던 딱지, 다마, 권총, 장난감, 자전거...우리 애가 피아노도 잘 쳤는데 치던 피아노와 비슷한 걸로 사서 서울 방과 비슷하게 꾸며놓았지요. 1년에 세번씩 크리스마스, 부활절, 여름방학 때 막내가 뉴욕에 와서 엄마를 만나고 갔어요. 나는 사업 때문에 가끔 보고, 이렇게 7년간 하다가 1982년 우리가 결국 뉴욕에 눌러살게 됐어요. 집 사람은 친구도, 가정부도, 운전사도 없고, 말도 안통하고, 우리나라 음식도 별로 없는 미국에 사는 걸 반대했었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막내 아드님은 본국으로 들어갔고, 회장님은 이민을 오시며 떨어져 사시네요.

"그러게, 운명인게지요. 형이랑 우리 가족 다 여기 와있는데, 저만 혼자 서울에 가서 살고 있으니... 타고난 운명을 거슬르면 못살아요. 그래도 1년 두세번 뉴욕에 출장 오고, 어디에 있더라도 매주 일요일 밤 9시엔 꼬박 전화를 해요."

 

-아드님이 이제 한국말을 잘 하는지요. 

"막내가 영국 교육을 받았고, 형들은 한국에서 대학 나왔지만 한문은 막내가 훨씬 잘해요. 대학 졸업할 때 엄마에게 쓰는 편지, 한글 일기장 글씨는 국민학교 4학년 때와 똑 같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안변하는지. 그런데, IMF(국제통화기금) 취직 후 고모한테 천자문 책을 사달라고 해서 하루 넉자씩 1년 계획으로 뗐어요. 처음엔 그림 그리는 것 같더니, 끝날 때쯤엔 곧 잘 쓰더라구요. 천자를 떼고 나서 한문 7600자 옥편을 사서 일확천금같은 한자성어까지 다 공부했고, 한글 문법책도 공부했지요. 재정경제부에서 거시경제팀장 기안 한글로 하지요. 영어는 필요한 때 쓰고요. 간부회의 때 누가 '한국어와 영어와 어느 게 더 쉬워요'하고 묻더래요. 그래서 '아무래도 영어가 편하지요'라고 했더니, '한국어를 우리들보다 더 잘 하는 데, 그럼 영어는 얼마나 더 잘하냐'고 하더래나. 하하. 한국 사람들이 영어만 잘 한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예요. 제 나라 말 못하는 사람은 딴 거 아무리 잘 해도 소용 없어요."

 

-조기유학 보내는 부모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부모의 역할이 아이들 좋은 학교 보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요. 부모가 관리를 해주어야 옳게 자라지요. 그건 부모만이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이 성격에 변화가 있던지 과격하게 될 수 있지요. 그건 자신이 영영 못고치게 되지요. 그냥 학교에 들여 보내고 두면 크는 게 아니예요. 사람은 세월이 길러주는 것이 아니지요. 부모님들이 배려를 해주어야 해요. 배려는 부모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요. 후세를 기르는데는 이런 지혜가 꼭 필요해요. 막내가 경제학 박사 받고, IMF 취직한 후 '아버지는 20년 계획을 성공하셨는데 앞으로 20년 계획을 더 세워주세요'하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네가 세우되 겸손하고, 몸 낮추어 살고, 열심히 일해라는 충고, 그 외는 능력이 없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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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행 골든클럽 회장은 낚시를 즐긴다. 참치를 잡으러 멀리 노스캐롤라이나, 멕시코(사진)까지도 갔다. 

 

 

호랑이 아버지의 설교: 정직, 겸손, 성실

 

 

-막내 아드님을 중심으로 살아오신 건 아닌지요?

"막내만을 위해 산 것 같은데, 집안 전체에서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지요. 형들도 이해했어요. 미국도 막내 때문에 온 것인데, 후회는 안해요. 장남은 한양대 경제학과, 둘째는 경희대 경제학과를 나왔지요. 서울대 들어가기 쉽지 않아요. 나같이 엉터리가 들어갔으니(하하) 둘째에게 사업을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몇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 큰 아들은 성실하고, 신용 잘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아직도 호랑이 아버지세요?

"막내가 홍콩에 있을 때 전화를 하는데, 건방지더라구요. 그래서 '야 이눔아 지금 당장 와'하고 전화 딱 끊었더니 그 다음 날 왔어요. JFK 공항 나가서 픽업해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한마디도 안했지요. 내 방 2층에 데리고 가서 '무릎 꿇어앉으라'고 했더니 영국에서 자라서 무릎을 못 꿇어앉더라구요. 집 사람도 나가라고 한 후 40분간 설교를 했어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구요. 그리고, 당장 가라고 했는데, 그날 비행기가 없어서 그 다음 날 비행기로 떠났어요. 

 

막내가 그룹 상무 때는 서울대에서 주는 관악대상(2009)을 받으러 갔어요. 막내네 집에서 일주일 지내는데, 코 앞에 있는 직장을 5분 일찍, 5분 늦게 가더라고. 그래서 떠나기 전 날 방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맘에 안드는데가 있다고 설교를 또 했지요. '나도 사장 노릇을 오래 했는데, 회사에 늦게오는 놈치고 이쁜 놈 없고, 일찍 오는 척하는 놈도 이쁘지 않아. 네가 부서에서 왕이니, 누구도 말하지 않겠지. 그러나 다 보는 사람이 있어. 앞으로 유의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어요. 그러니, '아버지 저도 경력이 20년이 넘었으니, 제가 알아서 할께요'하더라구. 그래서 '난 60년이 넘는 경력이 있다! 건방을 떨어도 분수가 있지'하며 야단을 쳤어요. 아버지가 세게 나오니 무릎꿇고 앉아서 '죄송합니다' 하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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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골든클럽 컴퓨터 교실.  사진: 서울대 뉴욕동창회

 

 

-지금도 아드님을 11살 취급하시나요.

"그렇지요. 여전히. 착한 놈이 따로 있어요. 혼낸 다음 날 아침 공항에서 '아버지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하고 보내더군요. '늘 겸손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고, 자기 몸 낮추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요."

 

-21세기에 '겸손해라. 몸을 낮추어라'는 너무 공자, 전근대적인 말씀 아니세요? 손녀들에게도요? 기가 죽지 않을까요.

"글쎄, 우리 아버지한테 나도 모르게 물려 받은 건가봐요. 하지만, 난 우리 아이들이 내 앞에서 그러는 거 못봐요."

 

-회장님 아버님도 호랑이 아버지셨나봐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집 신설동에서 가까운 학교 두고 날 저기 먼 종로 5가 효제 국민학교에 넣으셨지요. '학교가 가까우면, 애가 자라지 않는다'시면서. 내 방엔 히틀러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밥 먹고, 가방 들고, 히틀러 사진을 쳐다보고 눈싸움을 해야 했어요. 정신 건강을 위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마당 쓸고, 동네도 쓸었어요. 중학교 4학년 때 우리집 담장에 어느 여학생이 내게 연애편지를 던졌는데, 나를 무릎꿇게 하시더니 내 앞에서 편지를 읽으셨어요. 이화여중 다니던 지주 딸이 보낸 건데 우물가를 지나 다니며 봤지만, 말도 한번 못했지요. 아버지가 그 편지를 들고 여학생네 집에 찾아가셔서 여학생 아버지를 만나셨지. 그 여학생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애는 아주 망한 거지. 어머니끼리 아는 사이였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나이 쉰이 넘도록 시집을 못갔다고 하잖아요. 미국에 와서 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너무 미안하지. 아버지가 옛날 노인네지만, 그렇게 엄하셨어. 그래서 나도 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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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준행 골든클럽 회장.

 

 

-손녀들에게도 엄하세요.

"애들이 말 안듣게끔 잘 해요. 큰 아들도 엄하고. 우리 집 사람은 엄하진 않지만, 정도를 따지는 사람이고. 손녀 딸이 코넬대에서 패션 경영을 전공하는데, 어느 날 전화로 '봉 조르노'라고 하더라고. 제 2외국어로 이태리어를 택했다고, 한 학기 밀라노로 가서 패션 기사도 쓰고, 이태리말 공부해라 안해도 신청을 한 거지. 그러더니 이태리 패션회사 카날리(Canali)에서 일하게 되고, 이태리 사람과 결혼해서 살게됐지요."

 

-이태리와 패션, 할아버지 커넥션이 있네요.

"하하. 옛날에 이태리 가서 공부할 땐 '너 밥먹어' '먹었어' 엉터리 수준이었는데 예순다섯에 제대로 문법도 배우려고 베를리츠에 개인교습 등록한 했어요. 1주일만 하루 8시간 하자고 해서 수업을 듣는데, 온종일 영어도 못하게 했지 하루 첫날 9시에 가서 5시에 나오니 머리가 띵했어요. 어지러워서 이틀 째엔 안되겠다 하니 사흘이 고비라고 해서 세째날 수요일 아침 9시부터 공부하는데, 첫 클래스에서 도저히 안되어서 나왔어요. 의사가 혈압이 올라갔다고 하더라구. 그후엔 하루 2시간씩 공부했지. 그런데, 늙어서 공부하려니 머리에 안남아요. 그 옛날에 외운 것은 남아있고. 공부는 젊어서 해야지 나이 먹어 하는 것은 소용 없어요. 우리 아이들한테도 강조하지요."

 

-회장님이 늘 배우시는 분인데, 사모님은 어떠세요.

"집 사람(효당 이세영씨)은 26년째 롱아일랜드 우먼스 클럽에서 화요일마다 골프를 쳐왔지요. 그런데, 둘째 아들을 잃은 다음부터 골프를 중단하고, 바다를 보며 아들 생각하다 묘지로 가고 하면서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어요. 그러다 큰 아들이 권해서 서화협회(회장 박원선)에 다니며 서예와 민화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전력을 집중하더라구. 4년 후엔 서예 작가가 됐어요. 2014년 우리 결혼 60주년 기념 회혼례(回婚式)에서 전시회도 함께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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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60주년 회혼식의 상징은 다이아몬드. 이 회장은 이날 부인에게 다이아몬드를 선사했다. 이날 하객들의 축의금 5200달러에 같은 금액을 보태 동창회 장학위원회에 기증했다.

 

 

-사업에서 원칙이 있으신지요. 신용없는 고객은 어떻게 처리하세요.

"상대 안하면 돼요. 우리는 못 팔아도 좋으니까 딱 잘라버리지요. 철저하게 관리한다. 가발업계에서 준이는 너무하다고 하지요. 하루만 지불이 늦어도 물건 안보내구요. 석달 넘어서 돈 안내면 콜렉션 에이전트에 보내요. 우리와 안하면, 다른데서 거짓말할텐데. 그러니, 미국 사회에서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진실하게 살지 않으면 성공 못해요. 나는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밥은 먹고 있지요. 우리 이웃 사촌 마이클 팔콘도 유대인인데 낚시 친구인데, 참 친해요. 몬탁에서 고기 잡아서 우리집에 회먹으라고 가져오지요. 우리가 거짓말 안하고 진실하게 살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우리가 뭐 특별한가요? 거짓말하는 사람은 성공 못해요."

 

 

산 속의 표지판, 바닷가의 등대같은 어른

 

골든클럽은 1998년 서울대 뉴욕 동창회의 60세 이상 시니어 멤버 15인이 주축이 되어 창설됐다. 동창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과 친목도모를 위한 골든클럽은 2009년부터 이준행 회장이 지휘해왔다. 클럽 회원은 100명으로 제한하고 있어서 자격은 60세 이상이지만, 추천을 받아야 회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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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임광수 서울대 총 동창회장 뉴욕 방문 환영회에서 동문 반기문 UN 사무총장, 임광수 회장, 효당 이세영씨와 이준행 골든클럽 회장 내외.  

사진: 서울대 뉴욕동창회

 

 

-동창회는 어떻게 나가게 되셨나요.

"미국 와서 동창회에 전혀 안나갔는데, 어느 날(2002년) 우연히 신문에 보니, 기계과였던 친구 임광수가 서울대 총동창회장이 됐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임광수가 우리 동네에서 하숙하고 있어서 둘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안빼고 5시에 일어나 창신동 뒷산에 올라가 운동하고 내려왔었지요. 겨울 새벽 5시는 깜깜해도 같이 올라갔어요. 의지가 중요해요. 강한 의지가 있으면, 성공해요. 내가 늦으면 지가 깨러오고, 지가 늦으면, 내가 깨우러 가고... 장추화 연구소에서 무용도 같이 배웠지요. 그러다 6. 25가 나는 바람에 임광수는 청주로 피난가고, 나는 용인으로 가고, 그리고 내가 미국에 오면서 소식이 끊겼지요. 동창회에 전화해서 임광수에게 나 이준행이다 해서 다시 만났지요. 그래서 동창회 일을 시작했어요. 세월 참 빨리 지나가요.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죽을 때가 됐으니. 아직도 임광수 회장은 매일 남산 올라가고, 서울에 골프장도 몇개 있고, 임광 빌딩도 있고, 장학 빌딩도 세웠지요. 장학 빌딩은 세계에서 서울대 하나 밖에 없어요."

 

-장학사업도 활발하시던데요.

"임광수 회장이 장학빌딩 지을 때 20만불을 기부했더니 매년 1200만원씩 배당을 준다고 해서 뉴욕동창회에서 5명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작년부턴 장학생 자격을 서울대 재학생들로 하라고 해서 우리 회사에서 따로 준이 장학재단을 만들어 현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게 됐지요. 졸업할 때까지 지원해요."

 

 

2015준이 장학재단(이준행 회장)이 20일 퀸즈 베이사이드 소재 펄 이스트 식당에서 ‘제1회 준이 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을 개최했다. 이날 이준행(왼쪽 두 번째) 회장이 슈리사 마스키(오른쪽부터), 조셉 페도, 캐터린 김 학생에게 각각 2,500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했다..jpg

2015년 준이장학재단에서 제 1회 장학금을 전달했다. 사진: 준이장학재단

 

 

-이민 오셔서 인종차별을 경험하셨는지요.

"인종차별? 미안하지만, 난 그런걸 느낀 적이 없어요. 우리가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서 제 나라처럼 착각하고, 행동하면 안되요. 법을 잘 지켜야 하고 진실하게 살아야합니다. 자기 위치를 모르고 살면, 어디 가나 욕을 먹지. 자기 할 일 딱딱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욕 먹을 이유가 없어요. 인종차별 받게끔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향수병은 없으세요?

"처음엔 친구들이 없어서 후회스러웠는데, 친구들도 다 세상 떠나서. 여기서 사는 것 후회 없어요. 잘 왔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연말에 많이 먹어서 체중이 6파운드 늘었지요. 그래서 소식을 하니깐 8파운드를 줄였더니 몸이 가볍고 좋아요. 혈압도 내려가고."

 

-10년 후 어떤 모습이실까요.

"10년까지 못살아요. 편안하게 살다 가야지."

 

-후회 있으세요.

"안해요. 안할라고 노력하지요."

 

 

 2011동창회기차놀이.jpg 동창회 기차놀이중

 

 

-여생에 더 하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여행을 좋아하고, 잘 돌아댕기지요. 많이 다녔는데, 영국과 이태리를 잘 가는 이유는 관광이 아니예요. 가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어요. 집사람과 둘이 걸어가다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먹고 걸어다녀요. 그러면, 옛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요. 런던에 가면, 내가 살던 레스터를 꼭 가지요. 익스프레스 기차로 한 시간 타고 가서 클록타워를 보고, 골든 피시라는 중국집에서 식사하고, 친구들이나 만나고 해요. 집사람에게 오기 싫으면, 호텔에 남아 있으라고 하지만, 할 수 없이 따라 오지요. 그 옛날 그 고생하고 죽을 지경으로 살았지만, 향수병 그게 추억으로 남는거야. 어렸을 때 느낌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간다고 하지요. 이번 3월엔 영국 가면 한 바퀴 돌려고 해요. 막내 다닌 학교 기숙사에 '우리 아들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기부하려고 해요. 레스터 사는 친구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을 연결해주려고요. 어릴 적 데리고 놀던 친구 딸 가족 우리 며느리, 손녀딸 다 모이면 두 가족이 한 20명 되지요. '최후의 만찬' 식으로 식사를 하려고 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나를 누구도 '잘난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 사람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기억해주길 바래요. 막내 전화올 때마다 겸손하게 살아야 된다. 자기 몸을 낮추어가며 살아야 한다. 아랫사람이건 웃사람이건 똑같이 대해야 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하지요. 으시대지 말라고 해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리고, 건강을 꼭 지켜야 한다. 자기가 노력을 안하면, 지켜줄 사람 없다구요."

 

 

*Cool New Yorker <1> 행복을 바느질하는 남자 민형은씨

*Cool New Yorker <2> '르네상스 우먼' 케이트 오 트라불시

 

 

뉴욕컬처비트가 새해 PEOPLE 새 시리즈 Cool New Yorkers(쿨 뉴요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Cool New Yorkers는 세계 문화의 메카, 다민족의 용광로/샐러드볼, 뉴욕에서 독특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지게 사시는 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인사나 예술가, 언론에 종종 등장하는 분이 아닐지라도, 라이프 스타일이 우리들에게 영감을 주는 Cool New Yorkers를 찾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추천도 받습니다. Cool New Yorker로 추천하시는 이유와 연락처를 NYCultureBeat@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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