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5574 댓글 0

택시 블루스 <3> 다큐, 벤처, 라디오에서 택시까지 



나는 어쩌다가 뉴욕의 택시 드라이버가 됐나? <하>



박찬호는 항상 가장 늦게 나오는 편이었다. 

박찬호의 사물함이 마리아노 리베라의 바로 옆이어서 박찬호가 나오기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언론들은 젊은 백인선수들에게 주로 관심을 가져 파나마 출신인 리베라에게 말을 거는 기자는 별로 없었다.

리베라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스타답지 않게 겸손하고 소박한 인간적 풍모를 보였다.



unnamed (3).jpg

2008년 극단 연다 창단작품 '이수일과 심순애 in New York' 연습 장면.




반아 박사는 미주리주 시골에서 미국인 남편과 살고 있었다. 어찌나 한적한 곳인지 어떤 날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북한과 캐나다에서 이미 촬영해 온 영상이 있었다. 김반아 박사와 작품에 대해 의논하며 나는 시나리오를 썼다. 약 석 달을 이곳에서 지냈는데 이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미국에서의 내 고향은 미주리로 느껴진다.


제주도 촬영분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뉴욕에 들러 친구를 만났다. 대학 동기지만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형이다. 귀국 전날 친구는 사람 구하는 곳이 있으니 면접을 봐보라 했다.


한국에 돌아와 작업을 하던 중에 뉴욕에서 연락이 왔다. 어서 와서 일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촬영을 마친 후 김반아 박사에게 양해를 구해 후반작업은 미국에서 하기로 했다. 나는 가족을 남겨두고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이때가 2007년 11월이었다.


 

unnamed (2).jpg

2007년 김반아 박사님과 함께 다큐멘터리 'Sacred Misson' 후반 작업 중.



코니, 이 회사도 벤처기업이었다. 리틀넥에서 음악학원을 크게 하는 신동기 원장이 대표였다. 사무실은 음악학원 안에 마련됐다. 뉴욕필하모닉 연주자나 음대교수의 개인 교습을 촬영해 인터넷으로 유료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신동기 원장이 맨해튼 음대 교수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유명 뮤지션들의 섭외가 가능했다. 신동기 원장은 천생 음악인으로서 뉴욕심포니라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정기 연주회도 가지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이미 작업이 수개월 째 진행 중이었는데 전임자가 그만둔 상태였다. 촬영한 영상의 품질은 내 기준에는 불만스러웠다. 특히 오디오 품질이 문제였다. 인터넷 사이트도 한인업체에 외주를 줬는데 진행사항이 지지부진했다. 더구나 쇼핑몰 프로그램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한 것이라 이쪽에서 원하는 기능 구현에 출발부터 무리가 있었다.


업체를 독촉해 웹사이트를 간신히 오픈시키고 나서 즉시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를 직접 구했다. 의논한 끝에 줌라(Joomla)라는 오픈 소스 CMS를 사용해 필요한 기능을 구현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의 작업 끝에 새로운 사이트를 개설했다. 이때도 일은 많았지만 새로운 미국생활 체험에 즐거운 나날이었다. 친구가 제작한 연극에 주연배우로 출연도 했다.



unnamed (5).jpg

2008년 연극 '이수일과 심순애 in New York' 공연 당시.



그러나, 회사매출은 예상만큼 오르지 않았고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은행에서의 대출도 끊겨 회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회사는 버티다가 문을 닫았고 이 여파로 신동기 원장은 파산해 학원까지 넘겨야 했다. 나는 2년간의 기러기 생활을 접고 가족을 미국으로 불러들인 터였다. 



2010년 봄, 나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학교 선배의 소개로 뉴욕라디오코리아의 기자로 취업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박찬호 전담기자였다. 당시 뉴욕 양키스에 박찬호가 입단했다. 선발투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 출장할지 몰라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매일같이 양키구장으로 향했다. 이때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기자석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고 게임이 끝나면 클럽하우스에 가서 선수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데릭 지터 등 하늘같은 스타들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게중에 짓궂은 선수는 여자기자가 있으면 샤워 후 알몸으로 클럽하우스에 나타나기도 했다. 



unnamed.jpg

2011년 양키스타디움 기자석에서 내려다 본 경기장.



박찬호는 항상 가장 늦게 나오는 편이었다. 박찬호의 사물함이 마리아노 리베라의 바로 옆이어서 박찬호가 나오기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언론들은 젊은 백인선수들에게 주로 관심을 가져 파나마 출신인 리베라에게 말을 거는 기자는 별로 없었다. 리베라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스타답지 않게 겸손하고 소박한 인간적 풍모를 보였다. 박찬호는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내가 하도 찾아가니 나중에는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얼마 못가 방출당하고 피츠버그로 팀을 옮겼다.


이때부터 나는 일반기자 역할을 했다. 그 전에도 스포츠 이외 기사도 썼지만 다른 기자에 비해 비중이 적었다. 나는 내 장기를 살려 IT 뉴스를 특화했다. ‘재미있는 IT 이야기’라는 주간기획 코너도 100회 넘게 진행했다. 그래서 나를 IT 전문기자로 기억하는 청취자들이 많다.


라디오도 경영여건이 어려워지며 감원의 바람이 불었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보도국 직원들이 타겟이 됐다. 보도국장이 먼저 나가고 몇 달 후 나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라디오에서 신분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306835_3691000361863_28774448_n.jpg 2012년 라디오 기자 시절, 뉴욕을 방문한 강수지 씨와 함께.



장을 그만두고 몇 푼 안 되는 실업수당을 받으며 재취업 노력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영화를 전공하고 미디어 분야에서 일한 경력으로 인해 시정부 웹사이트에서 취업 추천이 들어오는 곳은 CBS의 책임프로듀서 같은 자리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만만치 않을 자리에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민자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던 중 예전에 다니던 개척교회에서 만난 한 집사님이 집에 컴퓨터가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고 해서 갔다가 내 사정을 듣고는 택시 운전을 권유했다. 그 분이 바로 현재 내가 운전하는 택시의 오너이자 파트너 중 한 명인 김성현 형님이다. 그 형님 입장에서도 눈수술로 인해 운전을 못하고 있던 터라 운전자 한 명이 필요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옐로캡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002황길재100.jpg 필 황/택시 드라이버, 전 뉴욕라디오코리아 기자

1960년대 막바지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고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486세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독립영화, 광고, 기업홍보 영상, TV 다큐멘터리, 충무로 극영화 등 영상관련 일을 주로 했다. 서른살 즈음 약 1년간의 인도여행을 계기로 정신세계에 눈뜨게 된 이후 정신세계원에서 일하며 동서고금의 정신세계 관련 지식을 섭렵했다.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차 미국에 왔다가 벤처기업에 취업,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2010년부터 뉴욕라디오코리아 보도국 기자로 활동했으며, 2013년 여름부터 옐로캡 드라이버로 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