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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Shows
2012.05.11 15:46

메트뮤지엄: 스키아파렐리 vs 프라다

조회 수 29119 댓글 0

1.ElsaSchiaparelli,1932,ByGeorgeHoynignen-Huene.jpg코코 샤넬 라이벌 스키압 "패션은 ART" 

억만장자 프라다 "패션은 no ART" 2.MiucciaPradaByGuidoHarari,1999.jpg 

 


패션 디자이너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 톱 클래스 디자이너들은 대개 남성들이며, 그들은 소박하게 입는다. 그리고,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디자이너라 할 수 있는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가 침묵을 깼다. 프라다가 50여년 전 전 유럽과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여성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 약칭 스키압, Schiap)와 만나서 ‘가상의 대화’를 나눈다. 무대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이며, 그들의 디자인 작품은 세트이자 소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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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넌의 간극을 뛰어 두 이탈리안 여성 디자이너가 만난다. 코코 샤넬의 라이벌이었던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패션 여제 미우치 프라다가 가상의 대화를 나운다. SP 

 


 지난해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회고전을 흥행시킨 메트뮤지엄이 올해엔 스키아파렐리와 프라다, 반 세기를 뛰어넘는 두 이탈리안 여성 디자이너를 선택했다. 지난 10일 시작해된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미우치아 프라다의 불가능한 대화(Elsa Schiaparelli and Miuccia Prada’s Impossible Conversations)’는 눈으로 감상할 뿐만 아니라, 이들간의 대화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갤러리 섹션 벽에서 상영되는 대화 비디오에서 1073년 사망한 스키압은 영화 ‘폴락’에서 잭슨 폴락의 부인 리 크래스너를 연기했던 주디 데이비스가 맡았다. 두 여인은 강한 이탈리안 액센트로 패션, 여성성, 일, 그리고 예술과 삶에 대해 대화한다. 이 비디오는 ‘물랑 루즈’의 바즈 루어만이 연출했다.  


 스키압은 당대 코코 샤넬(Coco Chanel)의 라이벌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샤넬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스키압은 2인자로 그늘에 가려졌다. 스키압은 살바도르 달리, 장 콕토, 알베르토 지코메티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즐겼다. 지난 달 맨해튼 바드대학원 갤러리에서 열린 스티븐 존스의 모자 컬렉션 전에도 선보인 구두로 만든 모자 ‘Shoe Hat(사진)’도 스키압의 작품이다. 아트 콜렉터이기도 한 미우치 프라다는 2003년 뮤지엄 프라다재단(Fondazione Prada)’를 설립하고, 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메트뮤지엄은 7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델인 ‘보그(Vogue)’지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명예의장으로 가담한 갈라 베너핏 프리뷰를 성대하게 열었다. 뉴욕에선 ‘올해의 파티’로 불리우는 메트 갈라엔 비욘세에서 지젤까지 스타들이 이브닝가운을 입고 몰려들었다. 

 

 왜 전시의 주제가 스키압과 프라다였을까? 

스키압과 샤넬, 프라다와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어떤가? 어쨌거나, 1954년 파리 디자인하우스의 문을 닫았던 스키아파렐리가 기지개를 펴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듯 하다. 내년 2월 스키아파렐리가 돌아온다. 패션계의 악동 존 갈리아노가 아트디렉터 물망에 오르고 있다. 메트뮤지엄 특별전의 후원은 아마존이 맡았다. 아마존은 곧 하이패션도 팔 예정이다.  이 특별전은 8월 19일까지 계속된다. www.metmuseum.org.

 

  

메트뮤지엄 전시  스케치                                                                                           

  

 갤러리는 각 섹션으로 나뉘어져 스키압이 192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에 디자인한 작품과 프라다가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작품(디자인 100여점과 액세서리 40여점)을 나란히 병치시키고 있다. 각 섹션의 벽엔 이들의 디자인 철학에 관한 대화가 8편의 비디오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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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위/허리 아래(Waist Up/Waist Down): 스키압은 윗도리에 치중했고, 프라다는 스커트를 역점을 두었다. 이유는? 스키압은 1930년대 카페소사이어티에서 식당에 앉은 여인들의 매력을 돋보이기 위해 상반신을 강조하는 장식을 많이 썼다. 반면, 1960-70년대 여성운동을 지켜본 프라다는 현대적이면서 여성성을 되살리기 위해 하의를 강조했다는 것. 프라다에게 하반신은 섹스, 출산 등 여성성의 상징이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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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위/무릎 아래(Neck Up/Knee Down): 이 섹션에선 스키압의 초현실주의적인 모자와 프라다의 도발적인 구두가 나란히 소개된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uglychic-schiap.jpg 스키압의 디자인 1927.

 

uglychic-prada.jpg 프라다의 1996-97 추동 컬렉션. 

▶추한 매력(Ugly Chic): 스키압과 프라다 모두 고급 취미와 저급 취미를 섞어 컬러, 패턴, 직물로 실험한 패션이 전시된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ardchic-schiap.jpg 스키압의 보그지 패션 1930.

 

 

hardchic-prada.jpg 프라다의 2004-05 추동 컬렉션.

▶딱딱한 매력(Hard Chic): 이들이 유니폼과 남성복에서 영향을 받아 여성성을 부인하면서도 또한 강조하는 디자인이 선보인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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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매력(Naif Chic): 소녀 취향의 감각으로 나비, 원숭이에서 바나나 무늬까지 활용한 패션이 병치되고 있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classic-schiap.jpg 1931년 스키압이 스키압 드레스를 입고 있다.

 

chlassic-prada copy.jpg 2004-05 프라다 추동 컬렉션.

▶고전의 육체(Classic Body): 스키압과 프라다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의 antiquity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소개한다. 그런데, 그리스 여신 같은 패션도 보인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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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육체(Exotic Body): 동양 문화에서 영향받은 의상이 선보인다. lame 같은 천에서 인도의 사리나 사롱 같은 실루엣도 등장한다. 스키압의 아버지는 *로마의 동양학 교수였으며, 프라다는 항상 중국문화에 매료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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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적 육체(Surreal Body): 1920년대부터 1954년까지 파리에서 작업했던 스키압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연관되어 달리나 콕토와 공동으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눈물의 드레스(tear dress)’ ‘구두 모자’, 그리고 ‘벌레 목걸이’가 이에 속한다. 한편, 정치학을 전공한 프라다는 연극 마임(mime)을 공부하다가 1978년 가업을 물려받아 패션계에 뛰어들었다. 프라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절충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스키아파렐리 E. Schiaparelli Vs. 프라다  M. Prada                                                

   

스키압과 프라다는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태어나 각각 철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우연히 패션 디자이너가 됐다. 이들의 디자인 센스,  유사성과 차이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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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스키아파렐리, Photo: George Hoyningen-Huené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

쇼킹 엘레강스(Shocking Elegance)

 

 

귀족 출신 어머니와 동양학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중 에로틱한 시집을 발표해 가족이 수녀원으로 보냈다. 수도원에서 단식투쟁 끝에 22세에 풀려나 런던으로 직행해 내니로 일하면서 뮤지엄을 돌아다니며 미술을 배웠다.

 

 이즈음 윌리엄 드 웬트 드 컬로 백작과 결혼 뉴욕으로 이주해 딸 마리아 루이자 이본느 라드하 드 웬트 드 켈러(별명 고고, Gogo)를 낳았다. 뉴욕에서 프렌치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던 프랑스 다다이스트 미술가의 아내 갸비 피카비아와 일하면서 마르셸 뒤샹, 만 레이와 교제하게 된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이혼하고, 피카비아와 만 레이를 따라 파리로 간다.

 

 1927년 스키압(Schiap)이라는 이름을 걸고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장 콕토 등 친구들을 위해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최초의 컬렉션이었던 초현실주의의 ‘눈속임(trompe l'oeil)’을 활용한 스웨터는 스키아파렐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니트웨어 이어 스포츠웨어까지 진출해, 혁신적인 치마바지를 디자인, 1931년 윔블던 대회에서 릴리 드 알바레즈가 입어 테니스계를 경악시켰다. 1931년엔 이브닝웨어를 추가하고, 부티크를 파리 시내 플라스 벵돔에 열면서 ‘스키압 숍(Schiap Shop)’으로 지었다.

 

 스키압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해 구두 모자, 눈물 드레스, 해골 드레스 등을 발표하면서 디자인에 혁신을 추구하는가 하면, 소재와 색채에서도 창의성을 보였다. 친구의 카르티에 다이아몬드에서 착상한 스키아파렐리 핑크(pink)는 쇼킹 컬러가 됐고, 쇼킹(Shocking)은 그녀가 출시하는 향수의 브랜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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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의를 강조한 스키압의 화려한 망토 19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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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존스의 초현실주의 햇 컬렉션에 소개된 구두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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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바도르 달리가 랍스터 전화를 만들고, 스키압은 랍스터 드레스를 제작했다. 심슨 부인, 안나 윈투어도 메트 갈라에서 입었다.  

 

 스키압은 치마바지(큐롯 스커트)와 다이앤 폰 퍼스턴버그가 리바이벌시킨 랩 원피스를 처음 디자인했으며, 지퍼에 컬러를 입히고, 브로치형 단추를 장식한 최초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리고, 패션쇼에 음악과 미술을 접목시킨 선구자였다.

 

 1939년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스키압은 뉴욕으로 건너왔다. 종전 후 파리로 돌아갔지만, 파리는 이미 크리스찬 디오르의 패션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4년 스키압은 부티크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같은해 자서전 ‘쇼킹 라이프(Shocking Life)’를 출간한다. 그리고, 1973년 11월 사망했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특별전을 즈음해서 스키아파렐리가 내년 2월 복귀한다고 발표됐다. 현 소유주인 디에고 델라 발리는 액세서리, 향수, 화장품과 의류 등 첫 컬렉션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물망에 오르는 디자이너는 지난해 히틀러 발언으로 크리스천 디오르에서 해고된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다.

 

 스키압의 딸 고고는 선박 재벌 로버트 베런슨과 결혼해 마리사(모델)와 베리(사진작가)를 낳았다. 손녀 베리는 ‘사이코’의 유명 배우 안소니 퍼킨스와 결혼했으나, 퍼킨스는 92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베리는 2001년 9월 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 노스타워에 충돌한 비행기 안에 타고 있었다. 

 

 

2.MiucciaPradaByGuidoHarari,1999.jpg 미우치아 프라다, Photo: Guido Harai

 

  

미우치아 프라다(1949- ) 

속물끼 없는 고급 브랜드

   

밀라노에서 1913년부터 대대로 고급 가죽 가방 사업을 해온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리아 프라다 비안키. 

밀라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스물네 살에 마임(mime)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밀라노의 피콜로테아트로에서 5년간 조르지오 스트렐러의 지도를 받았다. 그후 잠깐 공산주당의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1977년 열일곱살 때부터 가죽사업을 해온 파트리지오 베르텔리를 만나 그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받으면서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가 창업한 가문의 사업 프라다에 관여하기로 결심했다.

 

 프라다는 1979년 할아버지가 증기 트렁크 덮개로 쓰던 검은색의 나일론천으로 만든 백팩과 토트, 그리고 이어 핸드백을 발표해 대히트를 기록한다. 프라다 백은 실용적이고, 튼튼하면서도 유연한 선과 솜씨가 조화된 럭셔리 백으로 프라다의 시그내쳐가 된다.  

 

 1987년 프라다는 베르텔리와 결혼, 여성의류계에 뛰어들어 1988년 첫 컬렉션을 발표한다. 허리 선을 내리고, 가느다란 벨트를 쓴 프라다의 디자인은 곧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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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다가 히트시킨 실용적이고, 소박한 나일론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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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프라다의 춘하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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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다의 2011 춘하 컬렉션 중에서.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프라다는 루이뷔통 같은 고급 브랜드처럼 눈에 탁 들어오는 레이블이 아니다. 프라다는 눈에 띄는 어필보다 ‘반 특권의식’ ’반 속물근성’으로 인기를 얻게 된다.

 

 4년 후엔 자신의 별명을 딴 저가의 미우미우(Miu Miu)를 시작하고, 1995년 남성복을 론칭하면서 프라다를 3000만 달러 가치의 패션 제국으로 올려놓는다. 그해 미패션디자이너협회(CFDA)의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다미엔 허스트 등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해온 프라다는 베르텔리와 혁신적이고, 지성적인 미술을 소개하기 위해 갤러리 ‘폰다지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을 열었다. 이 곳을 통해 샘 테일러-우드, 아니쉬 카푸르, 마크 퀸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1999년 프라다를 구찌와 루이뷔통 계열의 LVMH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로 구축하기위해 헬무트 랑의 51% 지분을 매입했고, 몇 개월 후엔 질 샌더를 1억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또, 영국의 구두 브랜드 처치&컴퍼니의 8%를 1억7000만 달러에 매입하고, 안경 사업도 시작한다.

 

 그해 10월 프라다는 LVMH와 합작, 구찌를 누르고 펜디의 지분 51%(5억2000만 달러)를 사들인다. 프라다가 지불한 액수는 2억4150만 달러였다. 그러나, 2년 후 프라다가 펜디에 갖고 있던 지분의 25.5%를 LVMH에 팔게된다.

 

 프라다는 이탈리아의 동료 디자이너들로부터 “추악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프라다는 2003년 인터뷰에서 “난 섹시함의 절망스러움’이라고 부른다”라고 항변했다.

 

 2006년 프라다는 헬무트 랑, 질 샌더를 매각하고, 처치&컴퍼니의 45%도 팔았다.  타임지는 2005년 프라다를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 100인’에 선정했다. 

 

 지난해 프라다는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수입이 높은 인물로 밝혀졌다. 2010년 그가 올린 수입은 1382만 달러로 밝혀졌다. 남편 베르텔리의 수입은 조금 높은 1430만 달러였다. 올 3월 포브스지는 프라다를 세계 억만장자 139위에 랭크했다. 프라다의 연 순수입은 68억 달러로 밝혀졌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소지한 프라다는 2011년 한 인터뷰에서 “내 일을 패션 이외의 어떤 것을 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정치적인 야망을 내보이기도 했다. 

 

Fashion & Art: Words                                                                                              

 

1.ElsaSchiaparelli,1932,ByGeorgeHoynignen-Huene.jpg ♣스키아파렐리: 

장 콕토(프랑스 시인, 영화감독)와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유쾌했다. 단순히 팔리기 위한 옷을 만드는 조악하고 지루한 현실 이상을 지지하고 이해하는 것을 느꼈다.

 

2.MiucciaPradaByGuidoHarari,1999.jpg ♣프라다: 

난 미술가들과 함께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혼자의 힘으로 창의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난 내 작업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미술가들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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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와 거울, 그리고 비디오와 대화, 이탈리아 패션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와 프라다의 불가능한 대화' 전에서.  Pho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delfini2-small.jpg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하이라이트

*펑크: 혼란에서 쿠튀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