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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던은 로버트 드 니로, 잭 니콜슨, 로버트 듀발, 진 핵크만 등 스타들을 제치고 우디 역을 맡아 77세에 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절망과 회한의 우물에서 희망 건져내기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네브라스카(Nebraksa)’  ★★★★



이 영화를 꼭 봐야 할까? 고민했다.

77세의 노배우 브루스 던이 나오는 영화. 로라 던 아버지이지만, 주인공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불운한 배우. 괴퍅한 노인의 고군분투기일 것 같았다. 배경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네브라스카의 겨울, 그것도 흑백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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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유타주 주지사, 대모가 엘리노어 루즈벨트, 그러나 브루스 던은 조역 전문 배우로 80여편에 출연했다. Paramount Vantage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아니었다면, 올 겨울 지나치고 싶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페인이 누구인가? 

괴짜 남자 둘이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를 순방하며 피노 누아와 함께 인생의 쓴맛 단맛을 보는 영화 ‘사이드웨이즈(Sideways)’, 잭 니콜슨이 홀아비가 되어 딸 결혼식에 가는 여정을 그린 ‘슈미트에 관하여(About Schmidt)’, 그리고 하와이의 변호사 조지 클루니가 아내의 바람기를 추적하는 ‘디센던트(The Descendants)’까지 인간의 본성을 흥미진진하게 파헤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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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을 연상시키는 유머가 있다. Paramount Vantage


그리스계인 페인은 캐나다 출신 한인 배우 산드라 오와 ‘사이드웨이즈’에서 작업한 후 결혼했지만, 이혼했다. 
'네브라스카'에서 주인공 우디 노인은 한국전 참전 베테랑이며, 자동차에 관한 대화에서 'KIA'가 한국산임을 꼬집어 주는 대화도 나온다.
그리스계 남성은 ‘희랍인 조르바’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마초, 가부장(*실제로 나의 그리스계 여자 친구가 이점을 비판했다)적이다. 페인은 영화에서 여성보다 남성 캐릭터들의 마음을 현미경처럼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처럼 보인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날 오후,
2블럭만 가면 되는 '하이츠 시네마'로 '네브라스카'를 보러갔다. 동네 극장의 관객은 딱 3명. 그러나 스크린이 커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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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불 당첨금을 타겠다고 하는 남편을 치매라고 생각하는 부인과 아버지의 희망을 깨고 싶지 않은 아들.


‘네브라스카’는 지난해 나온 영화들 중 가장 미국의 현실을 가까이서 직면하고, 그린 영화일 것이다. 

역사극 ‘12년 노예’나 디스코 시대 배경의 ‘아메리칸 허슬’, 70년대 뉴욕 포크가수 이야기인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그리고 가까운 미래 LA 배경의 컴퓨터 로맨스 ‘그녀(HER)’,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 홀로 물에 잠겨가는 요트 안에서 사투하는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까지 할리우드 감독들이 미국의 현실을 감쪽같이 외면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도피한 듯 하다. 왜 그랬을까?


‘미국인의 초상’이라고 해도 좋을 ‘네브라스카’는 극장에서 오랜만에 보는 흑백영화다. 
사실 흑백영화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대학원 영화과 입시 시험 문제 2개 ‘흑백영화의 미학을 논하라’와 ‘중국 제 5세대 감독’이었다. 흑백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단순화해 주제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이미지 홍수 시대에 흑백 영화를 보는 기분은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는 듯 노스탈쟈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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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희망은 100만불을 타서 트럭을 사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점.


‘네브라스카’의 주인공 우디 그란트(브루스 던)는 알코올벽과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는 노인네. 

잡지 스윕스테이크에서 보내준 100만 달러 당첨 증서 하나를 갖고 상금을 타겠다고 몬타나주 빌링에서 700 마일 멀리 네브라스카의 링컨(수도)으로 가려고 한다. 그의 꿈은 단 하나, 상금으로 트럭을 사겠다는 일념이다.

운전을 못해 걸어서라도 가겠다는 그의 고집은 구박을 일삼는 아내(준 스킵)나 두 아들도 꺾지 못한다. 가족 모두 100만불 상금이 사기라는 걸 안다. 우디 노인만 모르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지만, 노인이라고 꿈꾸지 말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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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브라스카'는 몬타나에서 네브라스카로 700마일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로드무비다.

 
오디오 상점에서 일하는 둘째 아들 데비잇(윌 포르테)는 우유부단해 여자친구로부터 버림당한다. 결혼과 결별 중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둘째 아들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아버지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하고, 링컨으로 가는 여정에 동반한다.
빌링에서 링컨으로 가는 길 이들은 사우스 다코타주의 러쉬모어산에 들른다. 

미국의 대통령 두상이 조각된 산은 위용있는 미국의 자부심이 아니라 “누군가 지루해서 조각하다가 그만 둔 미완성의 작품’으로 치부된다. 아버지 우디는 대통령 '링컨'엔 관심 없다. 어서 네브라스카의 링컨으로 100만달러를 타러 가야한다.



# My Favorit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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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노예가 된 미국인들. 그러나, 자동차 이야기가 나오면 한마디들씩 한다.


가는 길 아버지 우디의 고향인 네브라스카 호손에 들러 늙어가는 형네 집을 방문한다. 

경기 침체로 집에서 놀고 있는 쌍둥이 같은 데이빗의 사촌들은 TV와 자동차 밖에 모르는 무지한 청년들이다. 
그랜트 부자는 오래 전 친구들과 만나면서 100만달러 상금 이야기를 꺼낸다. 순간 음주벽에 마을을 떠났던 탕아 우디 그랜트 노인은 마을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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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이 다 모여도 풋볼 게임 보느라 정신이 없다. 함께 있지만, 따로 즐기는 미국인들.


'네브라스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친척들이 거실에 모여 TV를 보는 씬이었다. 

친척들이 더 몰려오고 거실에선 유사하게 생긴 남자들은 TV에 정신이 팔려있다. 부인네들은 키친에서 일하는 중이다. 

이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TV의 시각으로 남정네들을 하이 앵글로 포착하는데, 시카고 대 디트로이트의 풋볼을 보느라고 TV에 열중한 남자들은 데이빗의 형 로스가 방문하면서 그제야 대화를 시작한다. 눈을 마주치며 하는 대화가 아니라 자동차 이야기에 끼어들기 위해서다.  TV, 아메리칸 풋볼, 그리고 자동차만이 이들의 관심이다. 중서부 시골 미국인들의 초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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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윕스테이크 100만불 당첨 이야기로 고향의 영웅이 됐다가, 그 때문에 추락하는 우디.


이 마을의 백만장자로 부상한 우디를 둘러싸고, 떡고물이라도 받으려는 이들이 나타난다. 우디 노인의 스윕스테이크는 조카들에게 강도당하고...

‘네브라스카’는 가족에 관한 로드 무비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구질구질한 장면을 생략하지 않는다. 

‘네브라스카’에서도 부자가 고속도로에 차를 세우고, 소변 보는 장면을 굳이 넣었다. 그의 영화 ‘슈미트에 관해서’에서 잭 니콜슨은 아내가 무서워서 화장실에서 앉아 소변을 보는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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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페인의 장기 중 하나는 남자들의 생리 의식이나 구차스러운 점을 여과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밥 넬슨의 시나리오는 100만 달러를 타겠다는 우디의 환타지에 동반하는 가족의 여정을 통해 그들이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든다.

부인 케이트가 호손에 왔을 때 공동묘지로 가서 묻혀있는 지인들을 회고하는 장면, 우디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니 폐허가 된 광경은 우디 자신 내면의 지도일 법하다. 죽음을 앞둔 노인(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자아)의 아메리칸 드림이 산산조각이 났더라도 이들은 가족애를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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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노인이 자랐던 집. 그의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은 이제 폐허가 됐다. 이들의 마음처럼.


흑백의 필터를 통해 본 황량한 겨울, 촬영기사 페돈 파파마이클의 네브라스카는 슬플 정도로 아름답다. ‘파리, 텍사스’의 라이 쿠더를 연상시키는 마크 오튼의 음악이 경쾌함 속에 애절함이 간간이 느껴진다.

우디 그랜트 역은 데이빗 린치 감독의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다분히 영감을 받은듯 하다. 브루스 던은 77세에 마침내 최고의 배역을 맡았고,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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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이후 빠지게 된 알콜도 우디의 삶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올 아카데미상 경주에서 ‘네브라스카’가 돋보이는 이유는 공허한 웃음도, 노스탈쟈도, 멜린콜리도 배제된 우리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도피성 오락이 아니라, 인생을 곰씹어 볼 수 있는 인생의 텍스트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곳곳에 맛깔스러운 양념처럼 뿌려진 ‘네브라스카’가 최상의 선택일 것이다.

'네브라스카'는 2014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조연(준 스큅, 아내 역), 오리지널 각본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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