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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Modern/Contemporary Artists
2014.02.18 10:57

아이 웨이웨이 100만불 상당 도자기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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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웨이웨이 마이애미 페레즈미술관 회고전 설치작 '컬러 베이스' 산산조각


항의였을까? 퍼포먼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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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화가가 페레즈미술관에 전시된 '컬러 베이스' 16개 색채 도자기 중 오른쪽 끝 녹색/분홍 항아리를 깨트려 체포됐다.
Photo: Daniel Azoulay/Perez Art Museum Miami



마미애미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중국 반체제 작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100만달러 상당 도자기 설치작이 파손됐다.


마이애미 일간지 뉴타임스에 따르면, 로컬 화가 맥시모 카미네로(Maximo Caminero, 51)는 17일 오후 마이애미 페레즈 미술관(Pérez Art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아이 웨이웨이 회고전 ‘Ai Weiwei: According To What?’의 전시작 ‘컬러 베이스(Colored Vases, 2007-2010)’ 16개의 컬러 도자기 중 하나를 깨트렸다.


당시 붉은색 상의와 검은색 바지에 검은 모자를 쓴 카미네로는 녹색과 분홍색 칠한 도자기를 집어 들은 후 바닥에 떨어트려 부수었다. 그리고, 옆에 함께 전시된 사진 작품 ‘한나라 항아리 떨어트리기(Dropping a Han Dynasty Urn (1995/2009)’를 천연덕스럽게 바라보는 장면이 비디오에 잡혔다. 카미네로는 사건 후 체포됐다.


*CNN 뉴스 사건 현장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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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ed Vases, 2007-2010. Installation view of Ai Weiwei: According to What? at the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Washington D.C., 2012. Photo: Cathy Carver.



‘컬러 베이스(2007-10)’는 기원전 206-220년대 제작됐던 한나라 시대의 도자기를 공업용 페인트에 담구었다가 꺼내 말린 작품으로 옛것과 새것, 동과 서를 접목함으로써 오리지널 미술품의 진위, 가치와 의미를 묻고 있는 설치작이다. 


아이 웨이웨이의 성상 파괴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가치가 창조될 수 있음을 표현한 퍼포먼스 사진 3부작  ‘한나라 항아리 떨어트리기’도 전시되고 있다. 동일한 타이틀의 아이 웨이웨이 회고전이 2013년 워싱턴 DC의 허쉬혼 뮤지엄에서 2012년 10월 7일부터 지난해 2월 24일까지 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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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Weiwei, Dropping a Han Dynasty Urn (1995)  Photo: Ai Weiwei


페레즈미술관은 이 작품의 가치를 100만 달러라고 밝혔다. 이와 유사한 아이 웨이웨이의 신석기 시대 9개 도자기 설치작 '컬러 베이스'(2007)년 2012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5만6325달러에 팔렸다.



002camineromug-thumb-200x227.jpg Maximo Caminero Miami-Dade Police Department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맥시모 카미네로는 파운틴미술박람회 등지에 소개된 화가다. 동료들 사이에는 침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카미네로는 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을 파손한 이유가 마이애미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에게 수백만달러를 쓰면서도 마이애미 미술가들의 작품은 소개하지 않고 있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카미네로는 지난 30년 동안 마이애미에서 살아왔지만, 현실은 똑 같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외국 출신 작가들이 모두 세금을 내며 살고 있는데, 페레즈미술관이 건축에 공공기금 2억 달러를 들이고 아이 웨이웨이 전시로 개관하면서 항상 지역 미술가들은 무시해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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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페레즈미술관의 아이 웨이웨이 회고전 전시 뷰.Photo: Daniel Azoulay/Perez Art Museum Miami



카미네로의 행위는 범죄일까? 퍼포먼스일까?


카미네로는 “난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이 100만 달러나 가는 줄 몰랐다”면서 “페레즈미술관에서 아이 웨이웨이가 고대 중국 도자기를 깨트리는 사진을 보았으며, 저항 퍼포먼스의 하나로 그에 동참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이어 “전시 중인 화병을 보면, 그것이 고대 도자기 위에 색칠한 것이라고 아무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나는 솔직히 홈디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화병이라고 생각했다”고 마이애미 뉴타임스에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미네로는 중범죄로 기소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마이애미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은 카미네로의 행위에 대해 옹호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쿠바 출신 화가 세르지오 가르시아(54)는 “마이애미 출신 화가가 행한 가장 용감한 행위로 맥시모 카미네로의 행동에 전적으로 칭찬한다. 그는 국제 사회에 로컬 아티스트들의 곤경에 정면으로 주위를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어떤 미술가들은 카미네로의 범죄가 고대 중국 미술품을 파손하는 것을 보여준 사진 ‘한 나라 항아리 떨어트리기’에 나타난 아이 웨이웨이 자신의 정치철학에 준하는 것이라고 옹호했다.



*Dropping a Han Dynasty 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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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베이스를 제작하고 있는 아이 웨이웨이. Photo: Ai Weiwei



한편, 아이 웨이웨이는 1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주장은 그 행위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만일 그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방법을 택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소유가 아닌 재산을 파손함으로써 자신을 곤경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57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아이 웨이웨이는 2008년 사천 지진 때 학교 건물 붕괴로 수천명의 학생들의 목숨을 잃은 사건을 집요하게 조사하며, 명단을 공개하는 등 중국 정부를 비판해 2011년 81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2011년 영국의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에 의해 세계 미술계 파워 랭킹 1위에 선정됐다.


페레즈 미술관은 지난해 12월 4일 마이애미 미술박람회 아트바젤 기간에 아이 웨이웨이 회고전 ‘Ai Weiwei: According To What?’으로 개관했다. 아이 웨이웨이 회고전은 3월 16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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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와 인해전술로 세상을 움직이는 작가 

Ai Weiwei(艾未未)

 

 

ai-weiwei-never-sorry-1.jpg 아이 웨이웨이

 


그를 보면, 미술가라기 보다는 징기스칸, 혹은 ‘삼국지’에 나올 법한 장군같다. 덥수룩한 수염에 기개가 철철 넘치는 중국의 아티스트,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55)는 중국 대륙을 호통할 것 같은 배짱, 호연지기를 품어낸다.

 

 

조각가, 설치작가, 건축가, 사진작가, 영화감독, 사회운동가...

 

아이 웨이웨이는 지금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다.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리뷰’는 지난해 11월 그를 '미술계 파워 100인' 중 1위에 선정했다. 그가 조각가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나 아트딜러 래리 가고시안, 글렌 D. 로우리 MoMA 관장 등을 제치고 톱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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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을 향한 아이 웨이웨이의 야유.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 정부가 베이징 올림픽을 경축할 즈음부터 딴지를 걸었다. 블로그에 중국 사회의 치부를 세계에 알리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마침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가 된 중국 정부가 블로그를 폐쇄하자, 바로 트위터(tweeter)로 바꾸면서 소셜네트워크로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중국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에게 베이징 올림픽은 정부의 선전이요, 현실은 두부공사로 무너지는 학교에 있다.

 

그는 분명 Think Big하는 아티스트다. 호연지기 정신과 소셜네트워크의 인해전술로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사고를 주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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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폭행으로 입원했을 때도 스마트폰을 들고, 트위터로 폭로했다.

 

 

아이 웨이웨이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원자화한 이 세상에서 지식인들의 임무인 사회정의와 진실폭로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트위터는 새로운 무기다. 그의 팔로워는 15만7700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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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미술관 'Haus der Kunst' 벽에 전시된 백팩 설치작 '기억하기(Remembering, 2009)' 앞에서 아이 웨이웨이. 

 

 

2008년 사천성 지진에서 목숨을 잃은 초등학생들 5000여명의 이름을 집요하게 추적해 공개하는가 하면, 독일에서 어린이들을 상징하는 백팩으로 중국 정부에 야유하는 설치작을 전시했다.

 


2011년 80일간 실종됐을 때 그는 차후 노벨 평화상까지 기대할 수 있는 인권운동가로 부상했다. 2010년 노벨평화상은 반체제 중국 지식인 류 샤오보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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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첼시의 마리분 갤러리에서 열린 해바라기씨 설치작 'Sunflower Seeds'. Photo: Sukie Park

 

 

경찰의 폭행을 포착해 트위터에 올리고, 끈질기게 고소하는 사회 비평가. 자기로 만든 1억개의 해바라기씨 설치작을 런던 테이트모던에 전시했으며, ‘Sunflower Seeds’는 2011년 2월 런던 소더비에서 55만9394달러에 팔렸다. 테이트 모던은 지난해 5월 아트펀드의 도움으로 800만개의 해바라기 씨 작품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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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로 해바라기씨를 만들고 있는 아이.

 

 

바야흐로 아이 웨이웨이는 21세기 세계 미술사에서 자신의 챕터를 매일 만들어가고 있다.

 

 

뒤늦게 빛을 보고 있는 일본 화가 야요이 쿠사마처럼, 아이 웨이웨이도 젊은 시절 뉴욕에서 살았다. 1981년부터 1993년까지 12년간 세계 미술의 심장부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던 이방인으로 뉴욕의 창의적인 에너지로 수혈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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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뉴욕에서 살았던 그는 지난해 아시아소사이어티에서 뉴욕 사진전을 열었다.
 

 

구도자인가, 싸움꾼인가? 미술과 정치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

 

 

아이 웨이웨이는 누구인가?

 

세계 미술계 파워 No. 1 아이 웨이웨이를 제대로 알려면 다큐멘터리 ‘아이 웨이웨이: 절대 미안하지 않아(Ai Weiwei: Never Sorry)’를 봐야 할 것이다. 맨해튼 IFC센터에서 상영 중이다. 323 6th Ave. 212-924-7771. www.ifccenter.com
   

 

469700_448211728536172_859612056_o-680x510.jpg 다큐멘터리 포스터.

 

 

♣ 다큐멘터리: 절대 미안하지 않아 Never Sorry!

 

 

  

▶고집불통 파워맨: 아이 웨이웨이의 일상과 궤변에 카메라를 댄 인물은 미국인 여성 앨리슨 클레이만(Alison Klayman)이었다. 사천성 지진 6개월 후인 2008년 11월 중국에 머물고 있던 스물네살짜리 클레이만은 아이 웨이웨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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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맨해튼 IFC센터에서 개봉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클레이만 감독. Photo: Sukie Park

 

 

▶뉴욕시절 사진전 단편영화: 당시 아이 웨이웨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지진 참사 사진을 올리고 있었으며, 클레이만의 친구는 그를 촬영 중이었다. 클레이만은 아시아소사이어티로부터 아이 웨이웨이가 뉴욕에서 살던 시절 찍었던 사진을 모은 전시회(*2011년 6-8월, Ai Weiwei: New York Photographs)용으로 단편영화를 만들라는 제의를 받았다.

 

클레이만이 만든 20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누가 아이 웨이웨이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Ai Weiwei)’는 2011년 3월 미 공영TV PBS에서 방영됐다. '절대 미안하지 않아(Never Sorry)'는 97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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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인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 '버드 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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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 '버드 네스트'.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 버드 네스트(Bird’s Nest): 아이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위해 세워진 스타디움 ‘버드 네스트’의 자문이었다. 그는 사천성 지진 이후 중국 정부가 올림픽 홍보를 위해 ‘스마일 작전’을 벌이는 것과 철저한 치안에 염증을 느꼈다.

 

그 해 여름 아이는 영국의 가디언지에 “중국의 금메달 수는 중요하지 않다. 사천의 학교 부실공사로 인해, 헤난의 매혈로 인해, 광동의 산업 사고로 인해, 사형제도로 인해 수 만명이 죽었다. 이런 수치가 진짜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고 썼다.

 

 

22WEIWEI1_SPAN-articleLarge.jpg  스튜디오에서 고양이와.

 

▶스튜디오: 베이징 외곽에 있는 아이 웨이웨이의 스튜디오 겸 거주지 주소는 ‘258 Fake’다. 키우는 고양이와 개만 40여 마리이며 조수는 부지기수. 가장 똘똘한 고양이는 작업실 문을 열고 닫을 줄 안다.

 

 

▶두려움: 단편의 마지막 장면은 중국 정부가 아이 웨이웨이의 상하이 스튜디오를 파괴하는 것으로 끝난다. 클레이만은 그에게 물었다.


 “왜 그토록 두려움이 없나요?”
 “난 무척 두렵다. 동시에 만일 네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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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금에서 풀려나온 후 자신의 실종을 알리는 T셔츠를 입고 다닌 아이 웨이웨이.

 

 

▶체포의 이유는 탈세 혐의: 2011년 7월 중국 정부는 지난해 아이 웨이웨이의 스튜디오를 수색하고, 3개월간 구금한다. 중국 정부는 그에게 185만 달러의 벌금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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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맨해튼 플라자호텔 앞 퓰리처분수대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12지신상 조각전이 열렸다. Photo: Suki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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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웨이웨이가 실종되자 플라자호텔 인근에서 한 여성이 아이를 시위를 하고 있다.

 

 

뜨거운 피 속으로 흐르는 반체제 정신

 

 

▶시인의 아들: 아이 웨이웨이는 1957년 5월 18일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반체제 시인 아이 칭(Ai Qing)으로 1958년 부인 가오 잉(Gao Ying)과 신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을 했다. 당시 고작 한 살이었던 아이 웨이웨이 쉬헤지(Shihezi)에서 16년간 살았으며, 1975년이 되어서야 가족은 베이징에 돌아간다.

 

 

▶북경영화아카데미: 미술가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는 첸 카이거, 장 이모우 등과 나란히 중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영화감독이 됐을지도 모른다. 1978년 아이 웨이웨이는 북경영화아카데미(Beijing Film Academy)에 입학해 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같은 해 그는 마 데셍, 옹 케핑, 후앙 루이 리 슈앙, 종 아쳉, 치 레일레이 등과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ars’를 창설했다.

 

3년 후 아이 웨이웨이는 뉴욕으로 건너왔고, 이 단체는 1983년 해체된다. 

 

ai-weiwei-ai-weiwei-williamsburg-brooklyn-1983.jpg 1983년 윌리엄스버그에서 아이.

 

▶뉴욕 시절(1981-1993): 아이 웨이웨이는 파슨스 디자인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과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공부하면서 일상의 사물로 개념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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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뉴욕 시절 제작한 옷걸이 설치작.

 

 

▶도박: 중국인들은 주말 떼를 지어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로 간다. 뉴욕 시절 아이 웨이웨이도 블랙잭 카드 놀이에 빠져서 종종 애틀랜틱 시티를 다녔다. 아직도 그는 프로 도박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6390188_640.jpg 앤디 워홀 작품 앞에서 아이.

 

▶아르바이트: 다큐멘터리에서 아이 웨이웨이는 조수들과 ‘카네기 델리(Carnegie Deli)’에서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먹는다. “난 한때 2애브뉴 델리에서 일했었지”하면서 그리고 남은 음식을 왁스 페이퍼에 일일이 싸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으로 돌아가다: 1993년 아버지가 위독하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편,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인 화가들의 실험적인 그룹 ‘베이징 이스트빌리지’를 설립했으며, 신세대 작가들을 소개하는 미술집 ‘Black Cover Book(1994), White Cover Book (1995), Gray Cover Book (1997)을 냈다.


 

▶세계 미술계 파워 No. 1: 2011년 10월 영국의 권위있는 미술잡지 ‘아트리뷰(ArtReview)’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 중 1위에 선정했다. 그러나, 중국 외무성은 “중국은 충분한 역량이 있는 미술가들이 많다. 우리는 이번 선정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견과 전망에 근거한 것이 잡지의 객관성을 위반했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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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웨이웨이의 아내인 화가 루 칭이 천안문 앞에서 치마를 들어올리고 있다.

 

 

▶결혼: 아이 웨이웨이는 화가 루 칭(Lu Qing)과 결혼했고, 이 여인은 1994년 천안문 앞에서 스커트를 올리고 속옷을 보여준 인물이다.

 

 

▶혼외 아들: 그에겐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이 있다. 아들과 친모, 아이 웨이웨이의 엄마가 한 집에서 산다.  

다큐멘터리에서 아이 웨이웨이는 “내 친구가 낳은 아들이다. 이런 관계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일어난 일이다. 어쩔 수 있겠나?”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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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개의 해바라기 씨와 15만여명의 팔로워. 아이 웨이웨이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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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스타일' 패러디에서 중국정부를 비판하기위해 수갑 찬 채 말춤을 추고 있는 아이 웨이웨이.



*관련기사: 중국 정부 아이 웨이웨이 '강남 스타일'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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